한계와 겸허
지금의 삶은 이상적이지도 정상적이지도 않습니다. 감옥 안에서의 삶과도 같습니다.
이점을 잘 인식하는 연구가들은 극한상황 혹은 한계상황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일반적인 한계가 있으며 개개인의 특수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아무리 잘 인식해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은 남보다 배나 노력하는데 타인의 평균 수준이 10인데 자신은 5를 넘지 못한다면 좌절감이나 열등감, 시기심 같은 감정을 갖게 될 수 있지만 2나 3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동료에 대한 존경심과 축복의 태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태어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내 머리가 하얗게 되고 피부가 쭈글쭈글해지는 것, 기억력이 현저히 감소되는 것, 몸 곳곳이 돌아가면서 이상증세를 보이게 되고 그렇게 건강과 위생에 신경을 썼는데 암 선고를 받는 것 등에 대해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것은 상상으로 그 해를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야심의 성격이 아니라면 포부를 크게 갖는 것은 나쁠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포부라면 아무리 크게 가져도 지나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인해 주변정리, 청소, 세탁, 몸의 청결 등을 등한히 하거나 게으름을 나타내는 것은, 지위가 높다고 해서 그런 것을 타인에게 맡기는 것은 일종의 착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해도 해도 극복이나 해결이 불가능하거나 도달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선행을 굳게 다짐하고 새롭게 살고자 아무리 강하게 결의해도 그나마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반복적으로 노력해도 계속 좌절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 겸허입니다.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동료인간 특히 선출직이건 임명직이건 그들이 업무에서 결함을 보인다고 해서 공식적인 직책에 있는 사람을 비난이나 단죄, 저주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딤전 2:1~3)
그들의 봉사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누리는 혜택이나 편의를 감사하고 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적인 것은 아니지만 벗어날 수 없는 한계들을 겸허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있을 죽음에 대해서도요.
약 3,500년 전의 모세는 보통 사람의 수명은 70세이고 건강하면 80세 정도라고 하였고(시편 90:10) 본인은 120세에 죽었는데 상당한 건강을 유지한 상태였습니다. 같은 시대의 욥은 200세 이상 살았습니다. 마음이 겸허하여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적게 받으면 오늘날도 그런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환경조건이 전혀 달랐던 약 4,500년 이전의 사람들은 1,000살 가까이 살았습니다.
아무튼 인간은 법칙으로 인한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만이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은 몸을 지녔을 뿐입니다.
인간은 피조물로 인한 한계와 불순종으로 인해 생긴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면 한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겸허하게 수용하는 사람은 본래적인 아닌 한계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