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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때문에

by 법칙전달자

공의 때문에


완전한 사랑의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면 왜 세상의 면면에는 그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부정적인 현상이 이토록 많은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연계도 그렇고 인간이나 인간사회도 그렇죠. 그런 현상들을 신의 부재증거로 꼽습니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일방적이고 공상적인 신관념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타당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신학적으로 고안해낸 신이지 실재 성서에 묘사된 창조주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의 주된 특성 중의 하나는 공의입니다. 사랑과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루는 특성이죠. 창조주가 피조물을 다루는 데는 물론 원칙이 있습니다. 특히 의식을 지닌 존재들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들에게는 그들이 의식적으로 순응해야 할 법도 함께 주셨죠. 인과법칙도 엄격하게 적용된다는 인식과 함께요.

“사람은 동료 인간을 해롭게 하지 말아야 된다”는 법칙이 있습니다. 모든 나라의 법에도 있죠. 인간은 죄를 지은 만큼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법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지요. 그리고 그 법이 집행되는 원리가 바로 공의라는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 가운데 극단적인 악행을 계획하고 주변의 일부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당국이 그 사람을 사형시켰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하긴 했지만 사형은 과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악행이 점점 심각해져 폭행 뿐 아니라 연쇄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데 당국에서 그냥 방치하고 있다면 경찰은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하는 비난을 받을 것이고 뒤늦게 그를 잡아 사형시켰다고 하면 오히려 늦었다는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공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공의의 시행도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관련 원칙은 피조물이 납득할 수 있게 시행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극악무도한 범행을 계획하고 반드시 실행할 의지를 가졌다고 할 때 물론 신은 이를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 그를 죽였다고 하죠. 사람들은 그가 아무런 악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그를 처벌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계획을 행동으로 옮겨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고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면 하느님은 뭐하는 것인가 하고 원망할 것입니다. 그 때 처벌을 한다면 드디어 인간들은 납득을 하고 찬양을 돌릴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다른 피조물이 납득하여 그 분의 공의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방법으로 공의를 집행한다는 것이죠.


노아의 홍수도 땅의 모든 사람이 악하고 땅이 악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예고하고 홍수로 멸망했습니다.

성서에 예언된 아마겟돈은 창조의 법에 끝까지 불순종한 인류의 멸망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없이 스스로 성공할 수 있고 신의 통치는 정당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는 도덕적인 도전을 하였습니다. 신은 그 도전이 그릇되고 실패할 것임을 알았지만 그들의 도전을 시험해볼 기회도 주지 않고 단지 도전했다는 이유로 처벌한다면 다른 피조물들이 납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명의 여지없이 충분히 도전을 시험해볼 기회를 주었습니다. 인간은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 가운데 있을 수 있는 모든 통치방법을 시도해왔습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인간들이 고안해낸 통치방법들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인간사회는 진정한 평화와 자유 그라고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그런 곳이 되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만이 확실할 뿐입니다. 인간 통치의 결과는 처참한 실패임이 여지없이 증명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공의가 집행되어도 의로운 피조물들에게 열렬히 찬양받을 수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아마겟돈이 임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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