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되어 있다면
말씀에 그렇게 되어있다면 그것을 의심할 것이 아니라 단지 이해해서 유익을 얻으려고 해야 합니다.
기본진리는 간명하지만 밀집도가 높은 단단한 영적양식도 있습니다. 그 밀집도는 계속 높아질 텐데 인간의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같은 크기에 성능이 좋아지고 있죠. 특히 칩은 빠른 속도로 그 밀집도를 높여왔습니다.
인간의 영적 수준이 높아질수록 영적 영식의 밀집도도 높아질 것이고 영적 용어의 발전도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해괴하게도 간명한 기본원칙들을 거부해 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집마다 누군가 지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히브리 3:4”입니다.
집은 물론이고 저절로 생겼을 법한 돌도끼 같은 깬석기도 인간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세포나 인간의 뇌 같은 것도 우연히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런 미친 정신이 있기도 힘듭니다. 세상의 미침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이 불치병에 걸려 있는 것이죠.
그런 초보적인 논리도 감당을 못한다면 밀집도 높은 사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3장 6절입니다.
우리가 말의 자유와 우리의 자랑스러운 희망을 끝까지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집입니다.
집이란 거하는 것이죠. 인간이 하느님이 거하는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차 언급하였지만 인간의 이성은 선언된 말씀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그 용도입니다.
위의 구절은 가언적 선언이죠.
말의 자유와 자랑스러운 희망이 유지되는 한 그런 사람들의 연합체는 하느님의 집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죠.
말의 자유란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하자가 없는 사람이나 가능하죠. 비난받을 여지를 지닌 사람은 자유롭게 말을 못 하는 법입니다. 죄지은 사람이 떳떳하게 말할 수 없죠. 겉으로 떳떳한 것처럼 말한다 해도 그 음색에는 그 점이 반영되어 예리한 사람에겐 간파될 수 있죠.
좌절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희망을 갖는 것도 도덕적 영적 자신감이 의식에 깔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죄책감이 있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는 자괴감이 있다면 희망에 대해 자랑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불의, 불법, 부도덕, 범죄로부터 자유로워 양심이 순결한 사람만이 말이 자유롭고 희망에 대해 자랑스러울 수 있습니다. 또한 증오나 분노, 두려움, 불안, 염려 같은 부정적 감정에 억눌려 있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되기가 쉽겠죠.
그러한 사람들의 연합체는 하느님의 집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거하시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게 할 수 있죠.
1세기의 이스라엘 장로의 회는 그런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과 제사장으로 임명된 144,001명의 하늘 정부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 세상의 인간의 정부나 어떤 연합체나 신도들의 모임도 그렇지 않죠. 악귀가 함께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악귀의 집에서 악귀가 차려준 식탁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 10 :21) 진화론이나 유물론 같은, 자본주의나 국가주의, 민주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같은 악귀의 음식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구원론이나 천국론, 지옥, 천당, 영혼불멸, 전생, 윤회 같은 교리도 그러합니다.
아직 하느님의 집에 초대되어 그 식탁에서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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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성의 한 사용법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