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by 법칙전달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음식을 입안에서 씹지 않고 삼키면 우선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게다가 소화도 잘 못 시킵니다. 그런데 약은 그렇게 먹죠. 먹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맛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속에서 잘 분해되게 되어 있죠.


학생들이 자신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의무적으로 형식적으로 억지로 하는 공부는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에 해당되는 지식을 약을 먹듯이 꿀꺽 삼키듯 하는 것이죠. 그러면 재미도 없을 뿐 아니라 소화도 잘 못시키기 때문에 그 지식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합니다.


입안에서 장에서 이르기까지 물리적, 화학적 분해는 이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즐거움도 유익도 있습니다. 먹은 음식이 피와 살이 되고 에너지원으로도 제대로 활용되는 것이죠.


반복하여 억지로 외우게 된 것은 그런 효과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암기력 테스트에서 100점 맞아도 실제로 그 문구 안의 의미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유익을 얻는 것도 전혀 아닙니다. 배운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당연히 적용하지도 못하는 것이죠.


본론에 이르면


악인은 공의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잠언 28:5)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지능이 낮아서가 아닙니다. 관심이 없어 의식, 자유의지가 그쪽으로 쏠려 있지 않기 때문이죠.


사실 세상에는 공의가 적용되거나 집행되지 않습니다. 말로는 정의와 원칙, 공정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공의란 공이나 죄의 정도만큼 상벌을 주고 필요에 따른 공급을 해주는 것을 의미하죠. 실제로 필요 이상으로 가진 사람과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공의가 시행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의는 사법과 경제 모두에 적용됩니다. 공정하지 못한 거래라는 것도 있는 것이죠. 의라고 할 때는 정의와 공의가 모두 포함되며 하느님의 사속성이 의지애력이라고 하는 데 사랑, 공의, 지혜, 능력을 의미하죠.

한자어로는 의가 제일 앞에 있죠.


창조주는 엄격하게 공의로운 분이며 한 치의 틈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공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말로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이해하는 사람은 정치인이 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학교에서도 공의를 배우지 않습니다.


당연히 만물을 지배하는 한 원리라는 것도 모르죠.


자연은 전혀 차별적이 아닙니다. 엄격하게 그러하죠. 한편 자연의 법칙의 한 정의는 “의식 있는 존재의 행동의 결과를 관장하는 영적 우주적 법칙”이라고 합니다. 행동에 따라 철저히 차별적임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말이죠. 그러니 행동을 함부로 합니다.


해는 의인이나 악인이나 동일하게 비추어 주죠.


잠언 9:17입니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은밀히 먹는 빵—그것이 즐거움을 준다.


몸 역시 의로운 자, 악한 자를 구별하지 않고 감각을 누리도록 하죠.


자연이 이처럼 차별적이 아니기 때문에 공의를 더욱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죠. 전투기를 몰고 가서 마구 폭탄을 투하하는 것입니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자연은 그 행동하는 과정을 제지하지 않죠.


그러나 공의는 속성이므로 당연히 법칙이 됩니다.


행동의 성격에 따른 시간의 경과 후에 기계적으로 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인류 전체나 인간 개개인이 겪고 있는 우환은 공의가 적용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공의를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득이나 쾌락을 추구할 뿐이죠. 어떤 국가나 정부가 그것을 추구합니까? 자국의 권익을 추구한다고 해서 온갖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행할 리가 없죠.


이해에는 행복과 유익이 수반됩니다. 세상에는 공의를 이해해서 오는 행복과 유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 구절의 말씀에 따라 여호와를 찾는 자 즉 창조의식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이해하죠.


모든 종류의 행복과 그 온전한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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