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상학

by 법칙전달자


뇌라는 표현은 성서에는 두 번 나옵니다. 인간의 신체 기관 중 가장 신비로운 곳이죠.


요즘은 뇌과학, 신경과학이 생겨 본격 연구되고 있는데 관련된 궤변이나 유사과학 같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는 사물은 외부지향성이라는 것의 영향으로 밖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실제는 뇌에 잡힌 영상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아이디어에 착안하여 몇몇 궤변성 주장들이 발전된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 자체도 뇌에서 고안해 낸 것이죠. 자기 자신도 뇌 안의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보고 있는 자신의 몸도 뇌 속의 영상이니까요. 상뿐만 아니라 소리, 맛, 냄새, 촉감 자체도 뇌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라는 것이죠.


우주라는 것도 자신의 상상이 지어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이고 하느님인 것이죠. 심지어 존재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과학이 철학이나 교리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기존 철학이나 종교의 교리에 대해서도 그러하죠. 뉴에이지사상이라는 것도 뇌과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죠. 인간의 생각, 감정, 행동이 모두 뇌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뇌를 하느님이 만들었다는 것도 뇌의 생가이라고 하면서 초월적인 존재인 것처럼 하려고도 하죠.

물론 이상의 모든 내용도 제 뇌 속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타자를 쳐서 이처럼 글을 올리는 행동도 뇌에서 하는 것인가요?


철학성 주장 같은 쉽게 부정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긴 합니다. 그러므로 미혹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원리를 이용하여 부자가 되거나 자신의 뜻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그 자체가 속이 들여다보이는 모순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수동적인 것이며 자신이 능동적으로 창출해 낸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아름다운 숲이나 들리는 감미로운 노래, 음식의 맛 같은 것들이 결코 자신이 능동적으로 만들어낸 것도 아니며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역시 몸의 요구에 따라 밥도 먹도 잠도 자고 화장실도 가야 하고 몸도 씻고 옷도 입어야 합니다.


몸이 아플 때가 생기면 약을 먹어야 하기도 하지요. 어디를 가려면 교통기관도 이용해야 합니다. 그 사람도 결국 늙어서 죽게 되지요.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그에 대해 수동적이죠. 나쁜 것에 대해선 극복해 보려고 하지만 결코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명상이라는 것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요. 식음을 전폐하고 수행에 몰입해도 결국 한다는 말은 선문답과 같은 것입니다.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요.


어떤 주장들이 참이려면 현상과 온전히 일치해야 하면 설명이 만족스러워야 하고 그 주장하는 바에 따른 실용성이 있어야 하는데 결국은 “끌어당김의 법칙이 잘 안 되는 이유” 등등으로 변명을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요가나 마음수련, 단학 등으로 실제로 인간의 근본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죠. 시크릿, 비밀수첩이라고 하는 뉴에이지식 해법을 제시해도 그것으로 인해 병이 낫거나 돈을 버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죠. 무당이 굿을 하는 것이나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외부에 있는 것이냐 내부에 있는 것이냐 따위의 논쟁은 존재론이나 인식론, 의미론 같은 공허한 철학성 주장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참 행복과 별 상관이 없는 것일 수 있죠.


이 모든 것이 뇌의 현상일 뿐이고 뇌의 상상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실용적인 가치가 있습니까? 그런 논쟁을 하다가도 소변보러 가야 하고 때 되면 밥도 먹어야 하는데요.


뇌에서 만들어낸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부모에게 전수받은 언어로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리고 그것은 너의 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상상이 아닙니까? 뇌의 현상이라고 하는 주장은 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주장의 진위와는 상관없는 것이며 자가당착적인 것입니다. 단지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기 때문에 실제나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정확하고 동일하게 그의 그러한 생각에도 그런 원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무의미하죠. 머릿속에서 짜낸 꾀라고 할 수 있으며 고상한 문구로 마치 심오한 진리가 있는 것처럼 권위 있게 표현된다 하더라도 우스꽝스럽거나 허황된 궤변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본인도 의식히지 못하여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일 수 있죠.


전도서 7:29입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뿐이니, 참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올바로 만드셨지만 그들이 여러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는 것이다.”


사탄도 그렇지만 그의 영향을 받아 인간도 스스로 신의 위치에 있고 싶어 할지 모릅니다.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할 것입니다.


참하느님의 존재를 무시해야 가능하죠. 창조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아야 그 가능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져 그럴 가능성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주에 뜻에 따라 일부 인간들은 영적인 존재 즉 신적이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창조주의 선택과 능력에 따른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주의 통치권에서 스스로 소외되어 하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입니다.


위 구절에서 생각해 낸 꾀들은 거짓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창3:7 )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서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창 3:22)”고 선언되었는데 이는 결코 긍정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성을 띈 기록으로 인해 그렇게 느껴질 뿐인 것이지요.


인간의 눈은 표면만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사람의 몸을 보는데 그의 내장이나 그 속에 있는 음식물이나 피 뼈, 대소변이 다 보인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아파트에서 위아래 층의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보이게 되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 현상일 것입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을 보고 느끼게 되었다는 것으로 일단 그들은 성기가 노출된 것에 대해 수치심이라는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악을 아는 능력이나 권한이 인간에게 없는데 인간이 스스로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을 의미합니다. 나름의 꾀로 그런 시도를 하였지만 처참한 실패인 것이 지금의 모습이죠.


인간은 육안, 눈으로도 보고 또 꿈이나 환상 같은 것은 뇌로 봅니다. 성서에 뇌가 사용된 두 가지 경우는 후자의 용법입니다.


인간이 눈으로 보는 것은 인간이 상상해 낸 것이 전혀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수동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뇌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영상이란 거울 속의 모습처럼 그런 성질을 갖는 어떤 것일 수 있는데 이 글은 그런 점에 대해서까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뇌는 인간의 존재 목적인 행복을 위해 창조주에 의해 주어진 경이로운 선물입니다.


어떤 연구가들도 뇌의 목적이 앎이 아니라 행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짜낸 꾀는 진정한 앎도 아니고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않습니다.


이를 알고 그 존재목적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 뇌의 유일한 올바른 사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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