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너져도
인간에게는 융통성, 유연성, 창의성 같은 것이 있으며 필요할 때 잘 발휘하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즉 그렇게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를 먼저 정확히 판단해야죠. 그래야 헛된 노력을 기울지 않죠.
바둑의 사활문제는 수나 난다는 전제에서 출제됩니다. 그러므로 관련 사고력을 사용하여 모색하는 것이 보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전에서는 사는 수가 없는 경우가 발생하죠. 그렇다면 살리길 포기하고 최대한 손해를 적게 보는 방법으로 죽이는 것이 최선일 수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바둑에서는 최선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죠. 이기는 방법이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죠.
인생에서도 체념이 최선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낭패를 보게 될 시도가 뻔하다면 무모하게 시도를 하지 말아야죠.
그런데 인간 누구도 그런 면에서 온전한 분별력이 있습니까? 없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무모한 희망으로 사실상 절망의 몸부림칠 때가 다반사인 것입니다. 본인은 모르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스스로에게도 최면을 거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삶의 문제에 있어서 극한상황, 한계상황이라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삶의 문제들은 틀린 것입니다.
실패한 이전의 방식에 대해 비평적 분석을 하고 정확하게 원인을 알아내고 그것을 해결하는 성공적인 방법을 창안해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이 하는 비평과 창작에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어 애초에 절망적입니다.
비평이란 기본조건에 대해서 하는 아니며 창작이라는 그 기본 틀에서 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은 태어나서 한국어를 배웁니다. 한국어에서는 자기를 낳아준 여자를 ‘엄마’라고 합니다. 거의 한국어에서만 그러하죠.
그런데 그런 점을 비평하여 “왜 꼭 엄마라고 해야 해?”라고 하면서 창의력을 발휘한답시고 “나는 ‘쭉방’이라고 할 거야.”라고 한다면 그리고 현실에서 ‘엄마’를 ‘쭉방’이라고 한다면 어떠할까요? 혼란이 발생할 뿐입니다. 낭패에 봉착할 뿐이죠.
언어적인 창작이란 기존의 확립된 어휘를 사용하여 무한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의 비평과 창작은 해롭기만 할 뿐입니다. 인간의 어떤 시도들은 그런 성격의 것이어서 그냥 절망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기대나 희망을 가질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 면은 인간은 다리를 사용하여 1km를 50초 안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약물을 먹고 열심히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일이죠. 그런데 자동차를 타고 가면 아니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도 그 정도 목표는 쉽게 이룰 수 있죠. 그런데 자동차를 타고 가라고 권하는데도 무시하고 자기는 어떻게 하든 뛰어서 그 시간 안에 도달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단지 지독하게 고집스럽고 어리석을 뿐이죠. 그런 전제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안 된다는 판단을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것이죠.
예를 들면 사랑으로 양보하면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말끔하게 해결될 것을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현재 세상의 모습니다.
군대를 두지 않고 무기를 만들지 않으면, 도구나 손을 폭력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전쟁이나 싸움은 일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싸우겠다는 마음, 불신, 증오, 적개심, 복수심 같은 것이 없다면 더욱 불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죽더라도 심지어 전멸을 당하더라도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 인간들이죠. 차라리 싸우다가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절망적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이 유일하게 현명한 것입니다. 다른 통치자 혹은 통치방법이라면 다른 제도라면 다른 이념을 적용시켜 보면 따위의 모든 시도들은 정말로 허사입니다.
수가 없어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기발한 해결책이라는 것도 신통한 해법이라는 것도 전혀 없습니다. 살길이 없습니다. 이미 침몰해가고 있는 배이며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는 열차이며 곧 탈출할 기회도 전무해집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면 전혀 예외 없이 익사입니다.
그 와중에 그 배에서 정치가는 연설을 하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가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죠. 축구선수는 공을 찰 수 있습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할 수 있죠.
싸우는 사람은 멈추지 않고 치고받고 계속 싸우고 물건 파는 사람은 계속 “싸요! 싸요!”를 외칠 수 있죠. 목사는 기도에 열중하고 목탁을 두드리며 나미아미타불울 외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런 모습에 판단력이 흐려져서는 안 됩니다.
배 밖의 구명선에서 아직 탈 자리가 남아있다고 외치는 목소리에 응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침몰하고 있는 것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비유적인 맹인들만 배에 남아 곧 있을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