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할수록
각 조직이나 단체에 지시하고 명령하고 훈시를 할 수 있는 지위나 권위를 가진 인간들이 있을 수 있죠.
만약 어떤 사상적인 훈시 같은 것을 하는 경우 그 본질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가르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나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디모데 전 1:6)
그들의 사생활을 보면 그런 점들이 쉽게 나타납니다. 머릿속에 짜낸 문구로 대중 앞에서 위엄을 최대한 전시하는 방법으로 하는 연설은 사실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에 자체 모순도 다분히 지니고 있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적으로 온전히 조화로운 진리란 강력하게 주장할 필요가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주장이라는 것은 그 자체에 모순이 내포될 수밖에 없습니다.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일수록요.
삼국지에도 조조와 유비, 제갈량과 사마의가 전쟁에 앞서 서로의 주장을 교환하는 장면들이 나오죠. 그 주장 자체의 절대적인 진실성도 따질 수 없는 내용이죠. 그럴 가치도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모두 자신의 일방적 입장에서의 천심, 민심 운운하며 하는 주장일 뿐이죠.
타인을 쉽게 이해시키도록 표현되지 않는다면 사실은 본인도 잘 이해 못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현학적인 문구들이 많은 것이 그럴 수 있죠.
이해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면 모를까.
어떤 사상적 진리가 담긴 책들의 번역서는 이것은 틀림없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번역한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 진리이고 그것을 이해했다면 주장하는 방식으로 쓰거나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상을 주변의 잘 알려진 소재를 사용하여 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이웃’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혈통적으로 가깝거나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와 같이 설명하지 않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비유를 들었죠. 그리고 직접 대답하지 않고 “누가 이웃이냐?”라고 질문하는 방식으로 질문자가 직접 대답하게 하는 방식으로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누가 10:29~37)
예수를 난처하게 하고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반대자들이 교묘하게 하는 여러 질문에 대해서도 그들이 꼼짝 못 하게 하는 방법으로 대답하셨죠. 세속의 보통 학자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죠.
본질을 해박하게 이해하고 있고 인간의 의식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갖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죠.
결코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었죠.
말하는 대상이 다른 사도들인 경우 상당히 다른 화법으로 사상을 전개하였습니다. 영의 인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영적 언어를 사용하였죠.
저도 비유나 예는 잘 사용하지만 기술하는 방법은 예수의 본과 일치하지 않죠. 나름의 비약이나 함축화법을 사용하여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부득이한 면이 있습니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내용은 대부분 제가 이해의 기쁨을 얻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이해한 만큼 이해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짜낸 사상이 아니라 전달받아 이해한 것을 전달하는 방식이므로 물론 주장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의도가 있는 것도 전혀 아닙니다.
이해의 기쁨을 공유하게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