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다

by 법칙전달자

잃다


돈이나 물건, 권력, 명예 등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죠. 의욕이나 기억 등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죠. 신체 부위를 잃는 경우도 있죠. 가족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실감이나 허탈감을 느끼게 되죠. 단지 상실감이 아니라 큰 상실의 고통이 되는 경우가 있죠. 건강이나 젊음도 잃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큰 것인데 상실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목숨이죠. 잃었다는 표현을 할 기회도 없죠. 그는 목숨을 잃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마치 그의 주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표현이죠.


저승길로 보내주겠다는 표현도 비슷하죠.


인간의 생명의 상실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부조리입니다. 심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요.


다른 모든 것을 상실해도 그 가치가 목숨과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가장 공포스럽고 허무하고 슬픈 것이죠.

그것이 인정이 안 되기 때문에 사후 생명을 주장하는 종교를 찾는 것이고 제사를 비롯하여 온갖 의식들이 생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 세상이 있다고 믿어야 심리적 고통이 완화되는 것이죠. 사자(死者)가 어디선가 생존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의 모든 의식들을 보거나 참여하는 것은 위안이 될 수 있죠.


오늘날에는 일단 자신의 시체를 냉동시켜 과학이 그 정도까지 발전하면 깨어날 것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죠.

모든 것은 거짓이지만 그렇다고 믿는 것이 손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므로 상당수의 사람들은 막연한 희망을 두기도 합니다.


현 생명을 잃은 것이 완전한 소멸은 아니라고요. 현생명이라 표현에서도 그런 뉘앙스가 있는 것이죠. 물론 오늘날 무신적이고 진화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혀 그런 기대가 없을 것이지만요.


이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쉽게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은데 진화론적 시각에서는 그것은 당연한 일상사에 불과하죠.


일상적으로는 목숨을 잃는다는 표현을 비롯하여 많은 표현들이 현생명이 끝이 아닐 수 있다는 암시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단지 인간의 허황된 소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까? 일종의 집단 무의식입니까?


인간은 답을 알 수 없고 생각도 다양하지만 관련 진실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 땅에서 육체로 부활된다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영적 존재로 부활되고요. 하늘에서요. 인간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진리를 알리는 성서의 일관된 핵심사상입니다.


예수도 목숨을 잃은 적이 있으며 영으로 부활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위해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인도하려고,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는 살아나셨습니다. (베드로 전서 3:18)


상실이라는 개념 자체도 인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실낙원 복낙원’이라는 말이 있죠. 인간은 낙원뿐 아니라 생명까지 상실하였죠.


낙원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창조묵적은 실패한 것입니까?


창조주의 이름 여호와는 ‘되게 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분은 그분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해 뭐든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 하여 생명과 낙원을 상실하자마자 대속과 왕국을 계획하였습니다. (창 3:15)


지금은 둘 다 실현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개개인의 선택입니다.


만물은 인간중심원리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인간의 선택은 모든 법칙의 상위에 있습니다. 그 선택에 따라 생명도 낙원도 상실되었고 지금의 어떤 인간도 낙원에서 갈고 있지 않고 영원히 살지도 못합니다. 젊음과 건강도 이내 상실되죠. 반드시.


인간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서로를 죽여도 자연을 이를 제지하지 않습니다. 자유의 철칙에 따라요.


잃은 것도 그 철칙에 따르지만 회복되는 것도 그러합니다. 대속과 왕국을 선택하는 인간은 반드시 낙원이 된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실패하지 않는 창조의 목적이니까요.


그런데 왜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단지 상실만을 선택하고 회복은 선택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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