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추리
한국은 상대적으로 경제 수준이 높아 대부분의 개인들은 현대의 전자 전기 기기들과 기본 시설들이 갖추어진 폐쇄된 주택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차량도 소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북한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개인주의도 깊이 뿌리 박혀 그것의 편리함도 누리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이 거의 의미가 없죠. 자신의 폐쇄적인 개인의 삶에 불편을 끼치지 않으면 타인의 삶에도 그렇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무런 감정관계, 이해관계가 없는 데면데면한 남으로 평화롭게 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들은 이기적 추리도 뿌리 박혀 있죠. 이해관계가 있는 경우 자기본위적으로 추리를 하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도 최종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계산에 의한 경우가 많죠.
가끔 이웃 혹은 동료인간에게 적극적인 혹은 공격적인 선행을 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같은 경우 복지제도도 잘 되어 있어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적극적인 기부나 봉사활동이 없어도 시스템으로 인해 비극, 극단적 상황은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난이나 전쟁지역의 가난이나 기아 등을 도울 필요가 있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하죠. 사실 세계적으로는 물자가 남아돌죠. 한국에도 오랜 기간 처분되지 않는 물자들이 엄청나죠.
과잉지역이 있고 부족 지역이 있지만 경제적 공의는 시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추리가 개별주의에 입각하고 있죠.
사실 인간들이 인간 본연의 추리법을 상실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삶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것의 참의미를 유일하게 아는 근원으로부터 배우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도 한껏 생각해 낸 것이 적극적 선행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다는 느낌도 있고 기분도 좋아지고 안심이 되기도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보람이라고 느낄 수 있죠.
여유가 있는 경우 일방적으로 베푸는 일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으로 조금이라도 명에를 얻기를 바라거나 답례를 바란다면 그것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은 아닙니다.
인간은 선행이라는 것을 할 때 그 결과에 조금이라도 연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행위 자체를 결실, 열매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에서 벗어나는 것은 잘못된 추리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하는 행위들을 굳이 선행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동일하게 그러합니다. 타인이란 본시 존재하지 않죠. 인간 전체는 하나의 지체입니다. 모두가 자신이죠.
어떤 면에서는 모두가 선행이고 어떤 면에서는 선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머리로는 진리를 배워야 하고 가슴으로는 사랑을 배양해야 하고 몸으로는 그와 일치한 행위를 해야 하죠. 선행이라고 특별히 구별 지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죠. 모든 행위가 선행이어야 하니까요. 모든 생각이 진리이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인간은 극히 희박하죠. 그러므로 선행이라고 하여 유별을 떠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면에 있어서 본연의 진보가 있는 것은 일상적이며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유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 대한 것이라면 그 결과는 타인이 맺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일이므로 그에 따라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나 그의 제자들도 삶을 선행으로 가득 채웠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본연의 행위를 한 것으로 충분히 절대자의 승인을 영구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활동에 대해 매우 감사하는 사람들도 있고 극단적으로 그 반대의 사람들도 있어 그들에게 심지어 죽음을 당하게 되는 그런 결과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인간 본연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너무나 빗나가 있습니다. 생명 자체에 대한 인식도 그러합니다. 곧 죽어 없어지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추리는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