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를 모르는
수치를 모른다는 것은 정반대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후안무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수치스러운 행동인지 모르는 것처럼 뻔뻔스럽게 죄를 짓는다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이죠. 드러나는 경우 부끄러운 척하는 경우가 있지만요. 그래도 그게 뭐가 죄가 되느냐는 듯한 뻔뻔스러움을 고집스럽게 나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넌 얼마나 깨끗해서 날 정죄하려는 거야. “똥 묻은 개가 재 묻는 개한테 짓고 있는 격이네.” 하면서 공격적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수치를 영광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빌립보 3:19)
인간들은 대부분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무뎌 있거나 도덕적 상대주의, 무신론, 진화론 등의 영향이죠.
부끄러움, 수치의 고통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부끄러움을 모르는 민족아, 함께 모여라, 모여들어라. 법령이 시행되기 전에, 그날이 겨가 날려 가듯 지나가기 전에, 여호와의 타오르는 분노가 너희에게 닥치기 전에,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닥치기 전에, 여호와를 찾아라, 그분의 의로운 법령을 지키는 땅의 모든 온유한 자들아. 의를 찾고 온유를 찾아라. 아마도 너희가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겨질 수 있을 것이다. (스바냐 2:1~3)
어떤 사람이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죠.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거나 부끄러운 행동에서 벗어나 있다는 면에서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줌의 부끄러움도 없다.”는 말도 있죠.
“보아라!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이다. 깨어 있으면서 자기 겉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자기의 수치를 보이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계시 16:15)
부끄러운 행동을 사람들에게 한 적이 없어 그런 면으로 정당한 비난을 받지 않은 사람을 행복하다고 한 것이죠.
또한 사람들이 비난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의로운 행동을 고수한다든지 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권고되기도 합니다. (누가 11:5-10) 이러한 면에서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입니다.
사람이 떳떳하게 사는 것은 기본이고 필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수치의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범죄 한 후 느낀 것이 수치의 고통이었으니까요.
문제는 지금 이후입니다. 대개 인간의 삶의 이력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수치로 점철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삶을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의할 수 있죠. 그러면 과거의 수치가 지워지고 심지어 거룩하다고 선언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는 한때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면서 육체와 우리 생각의 뜻대로 행동했으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큰 사랑 때문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 우리가 범죄 가운데 죽어 있는데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과분한 친절에 의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에베소 2:3~5)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여 그와 함께하게 하셔서, 우리가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에베소 1:4)
기껏해야 수 십 년인 지나간 한 때는 없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죄를 모르므로 수치를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죄악에 전혀 물들지 않는 시기가 있는 것이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여러분이 돌이켜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마태 18:3)
사람은 이와 같이 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래야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있죠. 돌이켜 그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순간까지의 과거가 어때했던지 간에 그렇게 되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