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상학

용어의 혼잡

by 법칙전달자

용어의 혼잡


오래전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실제로 이해하는 사람은 지구상에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그 번역자들 자신들이 이해를 못 하여 그 번역서들을 읽은 독자들 역시 매우 어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리라면 사상적 진리일수록 간명한 것일 수 있습니다.


물리적 법칙이나 원리를 이해 못 하는 것은 단지 상대성원리뿐 아니라 뉴턴의 운동법칙도 그러합니다. 그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죠. 양자 역학은 더욱 그러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걸 공부하면서 이해하는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시험을 보아야 하는 등의 이유로 공식이나 문구를 줄줄 외웠을 수는 있지만 깨달음의 희열을 누렸다고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의 공부하는 동기 자체가 순수하지 못한 것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수치로 표현되는 좋은 성적을 얻어 명문대학, 일류직장 등을 통하여 돈을 벌고 출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니까요. 그리고 깨달음의 즐거움과 유익을 얻는 것이 순수하고 직접적인 목적이라면 학교에 가지도 않고 경쟁적인 시험을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이나 공간에 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요. 어떤 허울을 굳이 가져 만족시켜야 할 공명심 같은 것도 전혀 필요 없죠. 이처럼 정신에 세속의 영향이 없는 사람이나 순수한 학문적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질을 이해 못 하여 번역에 있어서 용어의 혼란을 일으키는 것도 쉽게 감지가 됩니다.


悟性(understanding, Verstand) : understanding은 한국어로 이해로 번역되지만 수학에서의 ‘집합’ 물리에서의 ‘힘’이나 ‘일’처럼 용어로써 사용되면 일상적인 의미와는 매우 다른 뜻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해라고 하면 그 용어로써의 의미가 전달되기가 힘들어 고심하다가 근접한 의미를 가진 오(悟)자를 사용하여 오성이라 하였을 것입니다. 근래에는 지성(知性)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용어로써의 지성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원래 사용하는 단어이며 용어로써의 의미를 제대로 교육받지 않으니까요.


어떤 사전에서 다소간 쉽게 설명해 주는 것처럼 오성의 본질적 의미는 학문하는 능력입니다. ‘이해’라는 것은 “어떤 현상을 발생시키는 보이지 않는 요소들의 관계를 본다.”는 의미라고 하니 그것을 밝혀내는 것을 학문적 능력이라고 할 때 이해를 그런 능력인 오성이라 번역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 자체도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용어로써의 의미가 있는 것이죠.


동양의 사상은 대체로 직관적이고 종합적이고 신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문답 같은 것들이 많죠.

반면 서양의 사상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이죠. 그러한 사상이 가진 이점이 많아 동양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죠. 생소한 용어들이 많아 번역하는데 고심하였을 것입니다. ‘철학’이나 ‘형이상학’과 같은 단어들도 그러하다고 하죠.


기존에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추가해 전문적 용어로써 쓰는 경우도 많죠.


대중적이 아니기 때문에 모호하거나 애매하여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죠. 특히 번역자들도 이해하지 못하여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지 못한 것도 그 원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라면 본질상 간명합니다.


인간에게는 감성이 있고 그로 인한 감성적 지식이 있습니다. 현상에 대한 직접적 지식입니다. 이에 관한 뇌의 현상신호는 즉각적이고 정확히 작용합니다. 그에서 감각법칙이 나왔습니다.


태양은 둥글고 붉죠. 감성적 지식에 해당되며 혼란의 여지도 없습니다.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죠 각각 흰색이고 분말 형태이죠.


이런 지식 혹은 정보는 학문적 지식, 즉 오성적 지식은 되지 않습니다. 감성적 지식이죠.


사과는 자랄 때는 푸르다가 다 익으면 붉은색을 띠죠. 그런데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 보이지 않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오성적 지식, 학문적 지식입니다.


어떤 물리적인 현상을 낳은 보이지 않는 원인에 대한 지식이 오성적 지식 혹은 지성적 지식이고 그러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오성 혹은 지성입니다. 지성이라는 의미는 다른 뜻으로 훨씬 많이 쓰이기 때문에 오히려 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개념의 정립 없이 하는 공부는 정신이 없게 만들죠. 산뜻한 깨달음을 얻기도 힘듭니다.

그런 능력에 대해 새로운 학문적 용어를 만들지 않고 understanding이라고 한 데는 고심도 있었을 것이고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과일을 먹으면 맛도 좋고 영양도 있죠. 그 영양의 주된 본질은 포도당입니다. 그것을 현미경을 통해 관찰될 수 있으므로 감성적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당이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광합성에 의해서이죠. 광합성에서는 빛과 이산화탄소, 물 같은 요소들의 특정 관계나 작용이 있죠. 그것을 보아야만 광합성이 이해되는 것이죠. 오성적 지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해에는 “요소들의 관계를 본다.”는 의미가 있죠. 그래서 understanding이라는 기존의 단어가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죠. 용어로써의 특정의미를 부여하여 그 단어를 쓰기로 한 것입니다. 새롭게 조어(造語) 하지 않고요.


그런데 이러한 능력은 창조주로부터 부여받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창조주의 선언에서 직접적으로 알거나 그에서 추리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이죠.


오성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오성으로는 알 수 있는 것들은 감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죠. 감각법칙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중력을 만들었다는 것은 감성으로 확인될 성질의 것이 아니죠. 이성적 지식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 이성을 사용하여 진리라는 것에 이를 수 없습니다. 관련된 유일한 방법은 창조주의 선언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방법으로는 이성적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불가지법칙에 따른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의 용도는 그 선언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뿐입니다.


이 모두가 법칙으로 확립된 간명한 진리입니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살용적인 가치도 매우 높습니다. 이성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올바로 사용하면 행복과 자유 그리고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모르기에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고집스럽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을 다고 이해의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어려운 것으로 인식시켜 알기를 포기하게 한 것도 그 원입니다.


관련된 기본 개념조차 알려주는 교육이 없는 것이죠. 어려운 것이라고 속일 뿐이고 책도 그렇게 쓰죠.


용어에서부터 그런 책략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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