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자가당착
철학은 아무것도 증명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논리나 과학이죠.
철학은 아예 공식적으로 무엇에 대해서든지 하는 의심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죠.
어원(philosophy)의 의미는 지(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고 처음에는 광범위한 영역의 학문들이 이에 속해 있다가 분화되어 나갔다고 하죠.
지금은 철학이 거짓으로 결론지어졌죠. 종교와 더불어서요. 일종의 법칙으로요.
철학은 결코 학문이 될 수 없으므로 그러한 번역 자체도 어폐가 있습니다. 아무런 지식도 앎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무가치하고 해로울 뿐이죠.
그런 것이 기존에 있는 것인지 면밀하게 확인은 해보지 않았지만 저는 사상학(思想學)이나 사고학(思考學)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각각 인문학이나 논리학보다 더 포괄적입니다.
학문이란 인간의 지성(오성)의 본래적인 사용방법에 의한 것이죠. 학문적 통찰력과 추리력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발견, 발명할 수 있는 것은 창조주가 계시하거나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인간이 우주 창조의 시초와 방법을 정말로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인간의 보람이며 삶의 의미이므로 창조주가 밝혀주지 않는 것이 이치적이죠.
단 창조주의 선언이 아니면 인간이 영원히 알 수 없는 그런 성격 즉 영적인, 도적적인, 이성적 성격의 분야에 속한 것은 그분이 선언하시죠. 그것은 학문이 될 수 없습니다, 학문적 연구로 알아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죠.
창조주가 존재한다든지 창조주가 만물을 만들었다든지 하는 것이죠. 선악의 표준이나 인생의 목적 같은 것도 그러합니다. 인간의 이성이 그러한 것을 알아낼 수 없도록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것인데 그 설계자가 선언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인간의 이성의 용도는 이점과 관련하여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뿐입니다.
철학은 이성을 잘못 사용한 것이죠. 지금은 인간은 철학적 사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뉴턴이 운동법칙을 발표한 것처럼 발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논리, 심리, 언어 등등 소위 인문학 영역에 있는 것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상(思想)이라는 것에 대해서도요. 사고(思考)에 대해서도요.
어떤 사상, 어떤 추리가 옳으려면 그 사상이나 추리 자체에 적용시켜 보았을 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철학은 그 기초부터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라면 그 의심에 대해서도 의심해야 하는데 그러면 혼란에 빠지죠. “진리는 없다.”가 옳으려면 그 명제 자체도 진리가 아니어야 하죠.
“눈앞에 보이는 저 나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야? 나의 착각이거나 신기루나 환영 같은 것은 아니야?”라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어 생각을 발전시킨 결과는......
추리라는 것은 개념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개념이란 이미 확립된 진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호기심과 의심 모두가 무의식적인 것인데 전자는 창조주가, 후자는 마귀가 심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진슬 자체는 종교적인 것도 철학적인 것도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추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리란 기존에 직접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것을 판단하거나 결정할 때 사용하는 것이죠. 명시된 것을 기준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위의 진술 자체도 그렇게 얻어진 것입니다.
사변적이라거나 형이상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적이라고 하는 것과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어떤 형이상학적 사변적 사고는 생각하는 희열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의심이 바탕이 되는 철학적 사유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철학적 사유의 결론은 항상 거짓이고 해롭습니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라고 하는 것은 모두 독성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따라 운영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가 무슨 독약을 먹은 것처럼 휘청거리며 살다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교리도 철학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신학 자체가 철학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유교, 불교, 도교 등등의 동양사상이 모두 그러합니다.
철학이라는 이미지가 대중에게 긍정적인 측면이 있어 생활철학, 사회철학과 같은 표현도 등장하는 것이죠.
언어철학, 논리철학, 심리철학이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철학, 경제철학, 교육철학이라는 말은 종종 쓰입니다. ‘...관’이라는 표현은 ‘...철학’이란 말로 바뀌어도 의미가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견해, 주관 같은 것은 학문이 될 수 없습니다. 학문은 진리추구의 성격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은 아예 진리가 아니라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하죠.
논리적으로는 서로 다름은 공존되지 않습니다. 학문적으로도 그러하죠. 진리의 유일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3+5는 8로 영원히 유일합니다. 물의 분자식은 H20로 유일하며 영원히 그러합니다. 영원히 F=ma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도덕적 영역에 있어서는 이런 유일한 진리를 인간이 알 수 없다는 것이 법칙처럼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제각기 달리 생각하여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어차피 옳을 수 없기 때문에 따질 필요도 없다는 것이죠.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싸우지 않으려면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관이 뚜렷해야 하고 자기 철학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내 교육철학은 이래 혹은 이것이 내 인생철학이야.”와 같이 버젓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 것처럼요.
인간은 무엇인가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야 마음이 편하죠. 숭배성은 일종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나는 “내 주먹을 믿을 뿐이야.”라고 하는 것이죠. 어떤 인간이라도 무슨 정통성이 있으면 군주로 모셔야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북한지역이면 백두혈통인 경우 그런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선전에 활용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영성이라는 성향이 있어 그에 해당하는 사고라는 것을 해야 마음이 편한 것이죠. 소위 개똥철학일지언정 그런 성격의 생각에 젖어있어야 심리적인 안정감을 누리는 것입니다.
숭배는 어버이 수령님께, 신념은 사회주의가 되는 식이죠. 국가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정치철학은 소위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죠.
그러한 것들이 중독성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진정으로 옳은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죠. 어차피 틀린 생각이지만 그런 것들 중 뭔가를 선택을 하고 정착을 해야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정해야 하는 것이죠.
서로 다른 것, 분열된 것은 틀린 것인데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3+5의 답을 8을 제외한 다른 것으로 정해놓고 “나는 그것을 답으로 생각하고 평생을 살자.”하고 결심하는 격입니다.
따져 보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정해놓고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나면 이미 결정하고 정착한 그래서 마음을 두고 편안해하고 있는 것을 바꾸어야 할까봐 두려운 것이죠.
그래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이죠. 그런 사람은 그들이 결정한 대로 그렇게 되어야죠. 혹 귀를 열고 들었다가 “아! 저 말이 맞을 수도 있겠네.” 하고 기회주의적으로 위장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생기면 심판하기가 난처하게 될 수 있죠.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보기는 보아도 결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은 마음이 무디어졌고, 귀로 들어도 반응이 없으며,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이해하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이사야 6:9,10)
가식적으로 돌이키는 척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에게 불리한 심판을 내릴 경우 납득이 잘 안 되어 그 심판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죠.
철학은 긍정법칙과 같이 사고와 관련된 모든 법칙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도 영원히 파괴시키죠. 어둠 속의 맹인으로 살다가 소멸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