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착오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고후 12:16,17)
겸손과 존중심의 본이 되어야 할 사람이 이와 같은 스타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한글개역판의 번역은 평어체(반말체), 문어체, 고어체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공식석상에서 혹은 사적인 대화에서 그런 문제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죠.
예수는 30세 초반의 젊은 남자였습니다. 대중 앞에서 “...느니라.”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을 리 없습니다. 물론 그분의 제자들도 그런 말투를 사용하였을 리 없습니다.
당연히 경어체, 구어체, 그리고 현대어체를 사용하였겠죠. 말은 그렇게 해야 자연스러우니까요. 말투에 신경이 쓰이게 하면 내용이 잘 전달이 안 되죠.
위의 표현은
아무튼 나는 여러분에게 짐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내가 ‘교활’하고 여러분을 ‘속임수’로 사로잡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보낸 사람들 가운데 누구를 시켜 여러분을 이용하기라도 했습니까?
이렇게 되어야 자연스럽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 5:13)
이 표현은
여러분은 이 땅의 소금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어떻게 그 맛을 되찾겠습니까? 더 이상 아무 데도 쓸모가 없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죠.
예수께서 그 당시 청중에게 ‘너희, 너희’ 하면서 ‘...느니라.’고 하였을 것 같습니까?
어이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한동안 성서의 소지와 번역은 불법적인 것이었죠. 그렇게 하다가 죽은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번역과 보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죠.
그 내용은 기존의 그들의 교리와 숭배방식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어떤 번역은 7,000번 이상 나오는 여호와를 ‘주’로 바꾸어 버렸죠. 의도적인 오역이나 삽입도 곳곳에 있습니다.
아마 개신교 신자가 번역했을 그 번역에는 온전한 판단력이었다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위와 같은 그런 면이 있는 것이죠. 기독교인들의 정신의 온전치 못함도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죠.
오늘날 대중들에게 ‘너희’, ‘...느니라‘와 같은 어투로 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1961년에 번역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연설이나 사적인 대화에서 그런 투의 문체를 사용하단 말입니까? 편지도 그렇게 안 쓰죠.
미국에서도 그런 식의 문제로 번역된 성서가 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독실한 기독교인)이 그 성서로 영어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가서 그런 투로 말을 했는데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거나 매우 어색해하였다고 합니다. 사상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겠습니까?
교리 자체가 진실이 아닌 몽상에 가까운 것이기에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죠.
변역에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겉으로 드러난 면면 모두는 어쩌면 진리(말씀)에서 크게 일탈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황이라는 그 지위나 복식, 관련 의례 따위의 모든 것이 그러하며 교화건축물의 문양이나 십자가나 마리아 상 같은 것들이죠. 밤에 도시를 보면 붉은 십자가가 도처에 눈에 띄죠. 그것도 물론 그러합니다.
모두 변태적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죠.
세상은 종교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고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한글개혁판이 가장 권위 있고 많이 배부된 성서일지 모릅니다.
모든 면에서 다수, 주류라고 하는 것들도 그러한 점 때문에 그러한 변태성이 조금도 희석되지는 않습니다.
그 본질이 어이없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 버젓이 그런 행세를 한다고 할 수 있죠.
현상은 당연히 그 보이지 않는 본질을 반영합니다. 세상의 만연한 어그러진 현상들을 보고 그 본질을 간파하면 당연히 세상에서 나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