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본질
내세에서
자유의 본질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거나 하지 않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어떤 생각이든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죠.
불확정성 원리에 의한 것일 수 있습니다.
손톱을 보십시오. 그 안에도 무수한 전자가 있겠죠. 그 손톱을 이루고 있는 전자는 그 손톱 안에 위치한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전자의 위치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우주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0억 광년 떨어진 은하계 안에 어디엔가 존재할 수학적 확률도 0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원자 안에서 소위 전자구름이라는 그 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 전자구름이라는 것이 전 우주에 번져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전자가 궤도를 돈다는 따위는 개념은 원시적이 된 것입니다.
손톱을 구성하고 있는 진자는 손톱 안에 위치할 확률이 가장 높을 뿐이라는 것이죠.
인간을 양자 카메라로 찍으면 전 우주에 뿌옇게 번진 모습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주변이 가장 선명하긴 하지만요.
태양을 이루고 있는 전자가 우리 몸 안에서 발견될 수학적 확률도 0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그게 사실이면 창조주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죠.
인간의 생각도 어떤 생각이 언제 떠오를지 알 수 없으며 어떤 해괴한 생각도 떠오를 수 있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는 것이 더 신기하지만요.
그래서 인간의 생각이 옳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뇌에서 작동하는 생각 신호라는 것이 자유분방하고 창조신호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옳은 생각을 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신호와 일치할 확률도 0은 아닌지라 간혹 그것도 학문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진리가 발견되기도 하는 것이죠.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 이루어진 현상이죠. 그런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위대한 업적이 되어 길이 추앙받고 교과서에 실려 인류 전체가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영적인 영역에 대한 것은 그나마도 그렇게 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관련된 모든 인간의 생각은 거짓이죠. 물론 참과 우연히 일치한 경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이 전자의 경우와는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그것을 목표로 연구에 연구를, 검증에 검증을,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여 겨우 얻어진 것이지만 이 경우는 어떤 문제의 답을 문제는 보지도 않고 1이라고 찍었는데 우연히 맞게 된 것이어서 알게 된 것이라고 결코 할 수 없는 것이죠.
서론이 매우 길어졌습니다.
종교와 철학에서는 이와 같이 인간이 알기가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허황된 주장을 해왔습니다. 인간 영혼에 관한 전생이나 내생에 관한 갖가지 주장들이죠. 요즘도 전생이나 임사체험 등 관련된 많은 주장들이 있죠.
그리고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내세에 대한 기대를 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저승, 저세상에서 보자,” “내세에서 만나거든.”과 같은 표현들을 쉽게 시용하는 것입니다.
현생명이 전부라는 것을 심리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죠. 진화론자들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그렇게 세뇌시켜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요.
그들의 마음에 영원이라는 개념을 넣어 두셨다.(전도 3:11 ;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인간의 영혼의 무엇이지는 창조주만이 아십니다. 인간 그 자체가 영혼이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죽는 것입니다. 몸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는 그런 의식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단 그 사람의 개성이나 기억은 저장되었다가 어느 시점에 육체가 입혀져 부활되는 것입니다. 지구에서요. 부활은 성서의 핵심사상입니다.
세포 하나가 인간이 되는 것보다 쉬운 일이죠. 지금도 부활보다 더 어려운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활은 기정사실입니다.
기독교교리와는 전혀 다르죠.
그것이 내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많은 사람들은 그 내세에서 다시 한번 삶을 부여받습니다. 그때 전 배우자와 다시 결합할 수도 있죠.
그런데 곧 있는 멸망에서 죽는 사람들은 부활되지 않고 그것이 둘째 사망 즉 영원한 멸망이 됩니다. 내세가 없습니다.
부활될 사람들은 늙지도 병에 결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된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의를 행하여 다시 죽게 되어 영원히 소멸됩니다.
일일이 성구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성서에 명시된 진리입니다.
곧 뉴스에 부고가 아니라 누가 부활되었다는 소식일색이 되는 때가 됩니다.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 일상적이 되죠. 상당 기간까지는요.
살아서 그런 일들을 직접 목격하고 싶습니까? 지금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겪지 않는 선택을 지금 할 수 있습니다. 자유이니까요.
왜 그 절대적인 자유로 그렇게 선택하지 않습니까?
왜 반드시 죽거나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된다는 사망지향적인 철학, 교리를 따라 사망지향적인 삶을 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