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각법칙이 뒷받침해 주죠.
과학의 2대 기둥도 논리와 관측입니다. 그 논리가 아무리 그럴듯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수학이 아무리 우아해도 관측되지 않으면 가설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되죠.
인간의 뇌에서 작용하는 현상신호는 그 작용이 정확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신호, 형상신호는 자유분방이라 믿을 수 없습니다.
현상신호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확신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행복을 느끼게 해 줍니다. 어떤 봄(seeing)은 행복이 되죠.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 그것이죠.
보는 것은 믿는 것이 되며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보는 것이 충격과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아서 실망하는 경우도 많죠.
전혀 별개의 측면입니다. 원칙을 틀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람은 보는 것에 의존하여 믿음을 가지려 하고 보아서 기쁨을 얻으려 하죠.
그런데 그 보는 것으로 현혹시켜 속이려 하는 경우도 많죠. 좋은 것으로 보여 그 당시에는 기뻐하겠지만 속았다는 것을 알면 실망과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죠.
육안에만 의지한 결과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사물의 제도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질서 있게 놓였으며, 따라서 보이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히브리 11:3)
지극히 당연합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사물은 그 보이지 않는 설계가 먼저 정신에 보이지 않게 있었습니다.(유심법칙)
인간의 보이는 글도 들리는 말도 보이지 않는 정신에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죠.
그런데 인간의 마음의 무지와 고집으로 보아도 믿지 않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 20 :29)
생명을 주는 것은 영입니다. 육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입니다.(요한 6:63)
영이란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현상을 낳는 원인”으로 정의됩니다.
또한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사람들은 영안으로 매우 명백하게 보이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 분명한 현상들이 풍부히 증거로서 제시되어 있는데도 믿지 않죠. 행복하지도 않고 살지도 못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 당시에도 그렇습니다. 그분은 많은 보이는 이적들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신 들린 것이어서 죽여 없애야 한다는 것이 기존 권력자들의 반응이었죠. 그들은 기원 70년에 멸망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미 임해 있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거부하는 모든 존재들의 멸망과 함께 그 천년통치가 시작됩니다.
모든 법칙, 원리, 성질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 진실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들보다 더 우선적이고 근원적으로 작용합니다.
멸망도 법칙입니다.
고의적으로 무지를 선택한 사람들은 그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