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믿을 수 있는 이유
이유는 간단합니다. 논리와 관찰에 입각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유법칙과 감각법칙에 입각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사유법칙과 감각법칙에 입각해 있으면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뇌 즉 인간의 영혼이 그렇게 되어있다고 할 수 밖에요. 우리의 신체가 숨을 쉬고 밥을 먹어야 살듯이 우리의 정신은 논리적이고 관찰되는 것이면 믿도록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다른 설명은 없습니다. 그렇게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과학할 수 있는 기능이 선물로 주어졌으며 과학할 수 있는 기능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있습니다. 오성적 통찰력과 추리력이 내포되어있는 것이지요. 통찰력으로는 법칙을 발견하고 추리력으로는 그것을 응용해서 발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점차 그것으로 전 우주를 지배하도록 애초에 창조주에 의해서 넣어진 기능입니다.
삶의 목적은 행복입니다. 그런데 행복은 매우 다양하고 무궁한 세계입니다. 그 행복의 세계에는 과학으로 인한 영역도 있는 것입니다. 창의력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요. 이 모든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기능의 범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무한하고 영원합니다.
이점 즉 과학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인식한다면 창조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은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되며 그것으로 인해 행복은 배가 됩니다. 창조주는 인간이 자율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과학할 수 있는 능력 하나만 보더라도 인간은 당연히 영존해야합니다. 그리고 과학할 수 있는 능력의 위와 같은 주어짐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됩니다.
자유의지는 철칙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능력을 축복으로 여기고 그러한 능력을 창조의 섭리와 일치하게 사용할 수도 있고 그러한 능력이 맹목적으로 우연히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어서 자신의 충동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철칙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선택도 제지받지 않습니다. 법칙은 행동의 결과만을 관장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점 역시 과학할 수 있는 능력으로 알게 된 것이지요.
스스로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선악의 기준 없이 임의로 파멸적인 삶을 사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런 선택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는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은 이상하게도 좋은 것을 놔두고 나쁜 것을 고집스럽게 선택합니다.
성서는 그렇게 되는 것을 사탄의 인간의 정신을 눈멀게 하는 영향력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고후 4:4) 그 설명 말고는 달리 설명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