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입맞춤
한국은 키스문화가 보편적은 아니죠. 보편적인 곳도 있습니다. 동성 이성을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악수처럼 일상적이죠.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로마 16:16: 고전 16:20; 고후 13:12; 살전 5:26)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내 오라비라면! 내가 밖에서 당신을 만나 입 맞추더라도
아무도 나를 업신여기지 않으련만. 내가 당신을 이끌어 나를 가르치신 내 어머니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련만. 향료 섞인 포도주, 신선한 석류즙을 주어 마시게 하련만. 그이의 왼손이 내 머리 밑에 있고 그이의 오른손이 나를 껴안으련만.(아가 8:1~3)
자기 오라비와 드러내놓고 입맞춤을 해도 그것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으로 인식되었죠.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성과 하는 입맞춤은 연쇄적인 어떤 행동을 촉발하는 것이 될 수 있어서 엄히 금해지거나 눈총 받는 것이 될 수 있었죠.
또 그런 식으로 입술을 허용하는 것은 몸을 허용하는 것처럼 불쾌감을 일으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녀를 진정으로 위하는 지인에게는요.
“우리에게는 어린 누이가 하나 있는데, 아직 젖가슴도 없다네. 그가 청혼이라도 받는 날이면
우리 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누이가 성벽이라면 그 위에 은으로 흉벽을 세워 주고,
누이가 문이라면 백향목 널판으로 막아야지.”
“나는 성벽, 내 젖가슴은 망대 같아요. 그래서 나는 그이의 눈에 평화를 얻은 여자 같답니다.(아가 8:8~10)
아무나 밀어 쉽게 열리는 그런 문과 같이 입술을 허용하는 누이라면 그렇게 하지 못하게 제지한다는 것이죠.
아버지는 물론이고 오빠들은 누이의 참 행복에 순수하고 진지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이와 입맞춤을 한다 해도 조금도 불순한 것은 아니죠. 성호르몬이 조금도 분비되지 않는 그러한 것이죠. 달콤하긴 하더라도요. 아빠가 그 어린 딸의 뽀뽀를 받는 것이나 비슷하죠. 자지러진 행복감을 느끼더라도 조금도 성적인 것은 아니죠. 딸 바보가 되긴 하지만요.
술람미 처녀는 그 오빠들에게 자신은 성벽, 젖가슴은 망대 같다고 안심시키죠. 자신이 안기기를 원하는 목동인 연인이 보기에도 평화를 얻은 여자 같다고 선언하죠.
구애기간에도 남녀는 설령 입맞춤을 하더라도 포옹을 하더라도 격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유지하는 그런 것이 되어야죠.
자신은 그렇게 되어 있느니 오빠들은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한 것이죠.
키스나 포옹, 어루만짐은 어떤 경우든지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결혼 후에는 마음 놓고 성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도 거룩한 것이죠.
인간들이 그렇게 되기에는 필요한 교육과 훈련이 너무 부족하기에 아예 남녀 7세 부동석이라는 것이 생긴 것이죠. 같이 있지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피부도 노출되지 않게 몸 전체를 두리뭉실 감싸는 옷을 입게 했죠, 오랜 기간 동안요.
그에 비해 성서의 한 권인 솔로몬의 노래, 아가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들에서 일하느라 볕에 거무스름하게 탄 시골의 한 소녀는 그 많은 왕비와 후궁과 젊은 여자들을 거느린 솔로몬이 적극 구애를 했을 정도로 어떤 비범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구애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목동을 향한 술람미 처녀의 사랑은 일편단심이었죠.
사랑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부도덕은 배제되어 있죠. 젖가슴과 같이 어떤 노출을 연상시키면서도 순수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기 집으로 남자를 데리고 들어가 안기고 싶다는 묘사가 있어도 성적 부도덕과 연관되지 않은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애정 표현이 결코 부도덕한 행위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과 구애행위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모범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에 도착적이 된 오늘날의 대부분의 인간들이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지요. 차라리 미래의 남녀 간의 연애와 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른 더 깊은 의미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