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결론

by 법칙전달자

최종 결론


인간은 수사적 기교와 함축적 언어를 최대한 구사하여 철학적, 과학적, 문학적, 예술적 사상 등을 표현하려고 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쿼크에 대한 한 묘사는


“공간의 표면 위에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더 깊은 구조에서 투영한 일시적인 홀로그램적 섬광”입니다.


결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건 인간이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철학 관련 언어들은 더 그렇습니다.


진리일 수는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죠.


소위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도 궁극의 진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인간이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 과도기의 것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표현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기도 한 것이죠.


그리고 ‘알 수 없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답은 될 수 없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 사고, 언어적 기능 자체가 전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궁극의 진리를 알아내고자 한다면 그 여부에 대해 그 기능의 창조주만이 그 가능여부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의 궁극도 영적인 것이므로 결국 이성적이 됩니다. 누차 밝혀 왔지만 인간의 이성의 용도는 창조주의 언명, 선언, 말씀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결론을 수용하는 것이죠.


말씀을 최종결론으로, 궁극의 진리로 수용하지 않으려면 말씀을 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말씀에서 표명된 직접적인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해석해 의미를 변화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우주에서 가장 그릇된 사도가 됩니다.


종교들 특히 기독교가 그러한 반역적인 시도의 선봉이죠. 간명한 말씀을 진리로 수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가 되는 것이죠.


이성을 그 용도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이 없는 것보다 못한 것이죠. 즉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본래 잡혀 멸하여지도록 태어난 이성 없는 동물과 같아서(베후 2:12ㄱ)


기독교는 살처분의 0순위가 됩니다. 홍수 때 멸망된 모든 사람들도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였죠. 홍수 후에도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러합니다.


본래의 취지로 돌아와서


또 그들의 마음에 영원이라는 개념을 넣어 두셨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참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찾아내지는 못한다.(전도 3:11ㄴ)


인간은 영원히 살지라도 궁극의 진리에 이를 수는 없다고 선언한 것이죠. 피조물의 피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단 인간이 무엇을 알려고 추구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분도 관심이 있으시죠.


참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뒤쫓기는 것을 찾으신다.(전도 3:15ㄴ)


초끈이론이나 루프이론, 막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도 물질의 궁극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물질의 본질이 끈의 진동이라 하더라도 그런 끈의 본질은 무엇이냐고 할 것이고 다시 그것이 무엇이라고 하면 마찬가지로 끝없이 꼬리를 물것이니까요.


우주도 그렇습니다. 우리 우주자체도 그 크기를 추정하고 있지만 10가지 정도의 다중우주론이 있는데 다 소설 수준이죠. 끈 이론과 마찬가지로 관측불가이죠. 미시세계나 거시세계나 그 궁극의 본질은 알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자체에 대해서도요. 그것이 신호로 되어 있다고 해도 그 신호가 무엇인지는 역시 알 수 없죠. 사변적인 언어로 모호하게 묘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고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각자가 먹고 마시며 자기가 수고하는 모든 일에서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전도 2:12)


삶의 목적은 뭔가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글 제목의 최종결론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말씀자체를 궁극의 진리이고 최종결론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확고히 못 박고 있기에 더욱더 그러합니다. 그러면서 사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해괴한 모순으로 존재를 상실하게 되는 타당한 원인이 됩니다.


알 수 없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지만 피조물의 속성이라 수용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두려워하도록 참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전도 3:14ㄴ)


영원히 알 수 없는 그런 원리가 있음을 명백히 인식하는 것은 합당한 두려움을 갖는데 도움이 됩니다. 모르므로 일방적으로 구속력이 행사되는 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고 그 구속력이 불리한 것이 되지 않도록 원하는 마음의 태도가 두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전도 12:13ㄴ)


이 말씀도 삶의 방식에 대한 최종결론, 궁극의 진리입니다. 이 자체를 또 해석하고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한 어리석음이고 반역적으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자기모순, 자기파괴이고 자가당착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말씀이 도무지 필요 없습니다.


그냥 짐승처럼 지금처럼 살다가 죽으면 그뿐입니다.


인생에는 지침이 필요하고 그것은 유일하게 창조주의 말씀입니다. 최종적 결론으로 받아들이는 존중심과 겸허함이 필수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폭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