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
어떤 탐구는 그 자체가 허황된 것입니다. 이미 확립된 것을 뒤로하는 탐구인 것이죠. 이미 확립되어 그것을 바탕으로 삶을 영위하면서 인식하지 못하고 착각에 빠져 신기루를 쫓는 것이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은 우스꽝스럽게 느끼겠지만 본인은 진지할 수 있죠.
인간이 보고 듣고 먹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진리를 기반으로, 그것이 늘 작동하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무수한 창조의 법칙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고 그 안에는 무한한 지혜와 능력, 사랑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렇게 완비되어 있는 것이죠.
이미 부모가 존재하여 그 사랑의 돌봄으로 양육된 아이가 그 부모의 존재를 부인하고 부모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모순되고 어리석은 것이 인간의 사색 혹은 탐구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여행은 길을 잘 아는 부모의 인도에 따라 하는 즐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방황하고 고생하는 여행이 아닌 것이죠.
무한한 진리를 하나하나 체험하면서 깨달음의 희열을 만끽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대체로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확립되어 있지만 자신은 가보지 않는 길을 가면서 지식을 증가시키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죠. 방정식을 배우고 함수를 배우고 미적분을 배워가면서요. 수학을 사랑하고 물리학을 사랑하고 문학과 음악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죠.
인간의 탐구는 원래 그러한 것입니다.
창조주는 이미 무한한 영학(靈學)의 세계를 미련해두고 있죠. 수학이나 물리학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원천적으로는 그것도 창조주의 마련이죠. 문학이나 미학도요. 그러한 세계는 지적 정서적으로 큰 즐거움을 주는 세계이죠. 자신의 지적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이죠.
그러나 철학이나 신학 따위의 영역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둠의 세계입니다. 정치, 경제, 종교 따위와 관련된 영역들이 그렇습니다. 탐구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영역입니다. 숲 산책이 아니라 무모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등반이죠.
인간 사회가 맺는 열매도 두 가지입니다. 개발의 영역이 있고 파괴와 살육의 영역이 있죠.
폰으로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통화하는 편의를 누리지만 총알의 관통으로 비명횡사하기도 하죠.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경탄스러운 세계를 보기도 하지만 방사능 오염으로 눈 자체가 실명되기도 하죠.
돈이 삶을 쾌적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느끼게 해주기도 하지만 삶 자체를 망하게 하는 스트레스나 고난의 원인이 되기도 하죠.
그러나 수학 자체가 고난의 원인이 된다는 따위는 있을 수 없죠.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 그지없는 영적 행복을 주는 것은 굳이 그렇게 표현한다면 ‘영학’입니다.
지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즐기는 분야이죠. 행복학, 사랑학 등이 속하는 분야이죠.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세계입니다. 저는 매일 탐구하지만요.
탐구라는 것을 하기 전에 분별이 먼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