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종이 되는 이유
종으로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동족끼리도 돈을 못 갚으면 종이 되는 경우가 있었고 전쟁에 패배한 쪽에서 죽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종 혹은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죠. 오늘날 정상적인 사람이 종으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에도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 데 자신이 열심히 일하여 일하여 5의 소출을 거두는 경우 어떤 사람에게 속해서 일하면 더 적은 노력으로도 10을 거두고 3을 세금으로 내고 7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면 생각해 볼 것입니다. 더구나 그 사람이 가족처럼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자신의 복지에 관심을 가져 준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동족끼리 부채관계로 종이 된 경우에도 기한이 되어 자유를 얻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종으로 계속 살겠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 경우의 절차에 대해 성서에 기록되어 있죠. 아브라함이 그런 족장 중 하나여서 그가 거느린 수백의 종들은 경우에 따라 목숨을 바쳐 충성했으며 충성심으로 아브라함의 명을 수행하였습니다.
계몽군주시대에는 군주는 국가의 공복이라고 하기도 했죠. 예수도 크게 되려고 하는 자는 작은 자를 섬겨야 한다고도 하였죠. 그리고 예수의 참 추종자로 된 조직은 모두가 종으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인, 남종, 여종, 사환이 될 것을 명한 것이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참조직에 상좌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 가운에 스승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노골적으로 목사, 집사, 권사 등 그 칭호에 스승이라는 의미가 들어가게 하죠. 그리스도의 뜻을 역행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목사라는 표현은 성서에 있지도 않으며 집사로 번역한 디아코노스는 원해 '봉사하는 종'이라는 의미이죠. 참그리스도인 조직이라면 소위 교직계급이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죠. 신부, 사제,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으로 되어 있는 교직체계 자체가 그 종교가 거짓 종교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타인을 부리고 호령하는 위치에 있으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는 창조주의 승인을 받을 수 없죠. 성서에는 참 사람들로 된 조직을 사람의 몸에 비유합니다, 구성원은 각 지체이고 머리는 예수이죠. 몸의 지체를 보면 심장, 눈, 발톱, 머리카락이 하는 역할이 각각 다릅니다. 위아래가 있는 관계가 아니지요. 모두가 뇌의 지시를 직접 받습니다. 서로 조화롭게 기능을 하여 몸전체의 건강을 도모하죠. 조직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죠.
인간사회에서 사람관계에서 위아래의 개념은 없습니다. 비록 지시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더라도 결코 군림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겸손하게 봉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 창조주나 예수가 몸소 본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성서는 예수를 천년왕국의 통치자라고 하고 그와 함께 통치자가 될 정해진 수의 보조통치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통치는 일시적으로 존재하다 목적을 다하면 없어지겠지만 그동안이라도 그들의 봉사를 통해 인간 개개인은 완전해질 것이고 지구 전역은 낙원이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유의 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스스로 종으로서 복종하는 것인데 원래 사람 간에는 마치 상대의 종인 것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는 통치자입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서는 종인 것이죠. 이런 원칙을 무시하고 상전이 되려고 하는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파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능력과 지혜 그리고 덕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죠. 더 유능한 종이 되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봉사하는 종인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보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