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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침묵현상에 대한 대처

by 법칙전달자

영원한 침묵현상에 대한 대처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말이 있죠. 너무나 알고 싶은 것이 있거나 끔찍할 정도로 절실한 상황에서 신에게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전혀 응답이 없죠. "하느님 당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저는 인생을 올바로 살아왔는데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저한테 당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정말 존재하는 것이 맞습니까? 전 정말 당신을 믿고 살아왔는데 왜 제가 이처럼 끔찍한 재앙을 당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제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평생 저주하면서 살 것입니다."라고 아무리 울부짖어도 응답이 없죠. 무슨 심각하고 심오한 철학적 질문 같은 것도 그러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죠. 물론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은 수사법상의 과장이긴 하지만요.


그래서 신의 대리자라는 신부에게 물어보면 신이 어린 천사가 필요해서 당신의 아들을 데려갔다든지 하느님도 고통을 겪는데 고통이 뭐가 그리 대수입니까? 하는 답변들은 만족스러운 답도 성서적인 답도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신이 없다거나 무관심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인간의 관점과 신의 괸점은 다르죠. 이신론이나 범신론이 맞는 것도 아닙니다. 창조의 법칙의 적용은 엄정해서 인간의 개인적인 상황은 참작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해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를 수 있죠. 만물의 일도 어떤 시간표에 따릅니다.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이루어지거나 시간이 되었는데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전혀 없죠. 그때가 될 때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답답한 상황, 암울한 상황은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는 영의 열매이기도 하고 소위 신의 성품에 이르는 주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인내가 연단을 이루고 승인받는 상태가 되게 해 준다는 구절도 있죠.


성서의 경우 독생자인 그의 아들도 그렇게 처절하게 밤새 피땀 흘려 기도하며 이 쓴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호소하였는데 못 박힌 채 매달려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할 때까지 아무런 개입도 없었습니다. 성서에는 의인이 부당하게 고통가운데 죽게 되는 경우와 악인이 풍요가운데 장수하다가 평안히 죽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수십만으로 추정되는 신접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종류의 영적 체험을 직접 하는 일이 없죠. 그들에게도 한정된 범위에서만 가능하죠.


그러나 지정된 때가 되면 일거에 해결되죠. 모든 합당한 갈망이 응답되는 것입니다. 창조주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때가 되기까지 창조의 법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그것이 힘들다고 타협하거나 일탈행위를 하는 것은 그 점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해결책이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죠. 그리고 대부분의 종교 철학적인 문제의 답은 이미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거나 무시하려 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재앙과 같은 일을 당하더라도 현재에도 결코 방치되지 않습니다. 같은 신념을 가진 동료들의 도움이나 다른 방법의 도움이 있어 견디지 못할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는 욥인 경우 그의 전재산과 그의 자녀들을 처참한 방법으로 잃고 그도 고통스러운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죠. 그의 세 친구들도 그가 죄지은 것이 있어서 그렇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가 되자 그는 회복되었고 물질적 자산도 두 배가 되었습니다. 자녀도 열이 더 생겼는데 원래의 열은 부활 때 받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한 전능한 사랑의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떤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일이 왜 생기는지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부정적으로 단정을 하고 무신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진리가 아니라 사견이나 민간의 관습이나 국법에 따라 살죠.


그러나 지금은 그 점과 관련된 입증된 진리가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라는 이유로 그러한 삶이 결코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실제로는 노예화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내라고도 할 수 없는 삶이죠 죄가 있어 교도소에 살면서 자해나 자살 등 일탈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내하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요. 진리를 알고 적용하는 경우에만 진정한 인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더 이상 없는 영원한 삶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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