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노래는 많아도
노래의 적어도 반은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여정은 우리 둘만 가능해요. 혼자 외롭게 배회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셋이 가는 것도 불가능하죠." 제가 아는 노래, 상환(償還)의 일부 가사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 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구동성으로 어떻게 그런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하냐? 눈도 단단히 뻐었군하고 반응할 정도의 여인과 결혼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그는 다른 어떤 여자도 전혀 여자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콩깍지가 낀 것일까요? 그런데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났고 그녀의 심각한 인격적 결함들이 다 노출되어 이혼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 신념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에 대해서 애초에 에로스에 뭔가 신념적인 것이 더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고자 하는 것은 사랑노래는 많지만 사랑교육은 받은 적이 없어서 남녀 간의 사랑과 관련하여 법칙거스름이 만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인간은 한번 결혼하게 되어 있고 그 상태가 영속되는 것이 법칙입니다. 들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고 자신이 몸이 나뉘면 죽는 것처럼 죽어야 해체되는 것이 결혼 관계이죠.
현실은 젊었을 때 이성과 성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 등으로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해소되면서 배우자에 대한 열정이 식어 가면서 소위 다른 이성 생각이 난다는 것이죠. 그리고 상태가 좋은 경우에도 정 하나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전혀 그 반대입니다. 처음에는 경험이 없으니 성적 행복을 잘 모르다가 세월이 가면서 개발된다는 것이죠. 그런 원리에 따르면 부부는 세월이 가면서 성적행복의 강도가 커지고 질이 높아지는 것이죠. 그래서 1980년대 미국에서는 이런 원리를 적용시키기 위한 "고도로 순화된 일부일처제 운동"이 퍼지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현실은 짧은 밀월기간이 지나면 배우자에게 성적으로 고조된 관심이 식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잘 못 생각하는 추세이죠. 다른 이성에게 성적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여기고 있죠.
예수의 제자가 이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고 질문할 정도로 결혼 생활이 이상적이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죠. 이혼율이 50%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요. 예수는 그 원인을 비정과 불의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즉 의교육과 정교육을 받지 않은 것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죠. 오늘날도 물론 그런 교육을 받지 않습니다. 관련교육자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성적으로 자유로운 것 같아도 불행합니다. 음란물 등의 성도착 현상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진정으로 성적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실제 이상적인 성에 관한 법칙이 적용되고 있는 부부는 극소수일 것입니다. 현실의 비이상적인 여러 조건과 상황 때문이죠.
일부일처가 원칙이지만 고대에는 공식적으로 일부다처가 허용되었습니다. 남자들은 일찍 죽고 쉽게 죽죠. 원하지 않는 독신을 남자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지속한다는 것은 어려우므로 일부다처의 허용은 여성을 위한 배려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성 측에서도 언제 과부가 될지 모르는 불안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부와 권력이 있는 남자의 첩을 택하는 것이 나았죠. 예전에 한 중국황제가 허리가 가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자 많은 여자들이 밥을 먹지 않아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하였다는 과장되어 보이는 기록이 있는 정도입니다.
또 아무리 이상적인 원칙하에 맺어진 부부관계라도 현재의 부부관계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성서에서는 사람이 부활되면 이전의 결혼 관계는 해체된다고 합니다. 부활이 되어 죽기 전의 배우자와 다시 결합하고 싶으면 그와 재혼을 해아겠죠. 여러 여자를 아내로 둔 경우 그 들 중 하나나 혹은 다른 상대와 결혼할 수 있겠는데 다윗인 경우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다시 아내로 선택할 것입니까? 밧세바인 경우 우리아나 다윗 가운데 선택을 할 것입니까? 그건 모르죠.
저는 인간의식과 관련된 법칙을 전한다는 차원에서 글을 씁니다. 부부간의 법칙 그리고 성적 행복에 관련된 법칙을 이글에서 전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