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감각기관
광경을 보는 것과 글을 보는 것이 다르고 새소리를 듣는 것과 강의를 듣는 것은 다르죠. 개 눈에도 글이 보이고 고양이 귀에도 강의소리는 들리겠죠. 글을 보는 것과 강의를 듣는 방밥으로 즉 그 의미를 수용하기 위해 그렇게 사용하는 것을 고등감각기관으로서의 사용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시각과 청각기관은 그런 면에서 고등감각기관이죠. 물론 일반감각기관으로 사용할 때가 더 많을 것입니다. 고등감각기관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하죠.
인간의 촉각도 고등감각이관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손으로 점자를 읽는 경우이죠. 미각이나 후각도 고등감각기관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고등감각기관으로 사용되는 것은 약속이 전제가 돠죠. 특정 소리나 기호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사전에 알고 있어야죠.
오렌지향을 '나' 장미 향을 '자다'로 약속헤 놓고 누군가에게 오렌지 냄새와 장미향을 차례로 맡게 해 주고 "나는 잔다"라는 뜻을 전하는 것이라면 후각을 고등감각기관으로 사용하는 것이죠.
인간에게 시각과 청각이 고등감각기관으로서의 기능이 부여된 데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과 일치하게 사용할 때 그것을 통해 자신과 남이 기쁨과 유익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하가니 글을 쓰는 것은 타인의 시청각의 고등감각기관으로서의 사용을 전제로 하고 있죠.
듣고 보는 것은 인간 영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괴물로 만들기도 하고 성인으로 만들기도 하죠. 인간은 취사선택해서 보거나 들을 수 있고 어쩔 수 없이 보고 듣게 되는 경우도 있죠.
인간에게는 보거나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는 것과 반드시 보고 들어야 되는 것 그리고 선택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이러한 분별력을 사용하여 그렇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전애 숙고하려면 관련된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원칙을 배우지 않기 때문이죠.
듣고 보는 것은 토기장이 손에 자신의 영혼이 틀 잡히도록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큰 토기장이가 있고 인간이 보고 듣고 하는 것으로 그 영혼을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틀 잡고자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노예상태입니다.
무엇을 보고 들을 것입니까? 무엇을 보지 않기 위해 단호히 거절할 것입니까? 이런 점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되는대로 보고 듣는 것은 잠시 이 세상에 기형적인 존재로 있다가 소멸되는, 즉 가치가 없어 깨트려지고 마는 그런 질그릇으로 잠시 있디가 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영구히 보존될 가치가 있는 그런 그릇으로 자신을 틀 잡아 줄 그런 토기장이도 있습니다. 그걸 분별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