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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도 하지 않는

by 법칙전달자

꼼짝도 하지 않는


양자 요동은 지금으로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풀 한 포기, 하루살이 한 마리 만들지 못하는 데는 결코 임의로 통제하지 못하는 양자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세계의 근본이 그러하다면 인간의 의식세계도 그러합니다. 우발적, 맹목적, 비연속적이죠. 왜 그런 생각이 그 순간에 떠 올랐다가 끊기고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죠, 생각만 그러냐 하면 그에 상응하는 영상도 그렇죠 안건은 눈으로 보지만 꿈처럼 뇌로 보는 것들이 있죠. 눈으로 보는 것은 무엇을 보거나 안 보거나 통제할 수 있죠.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사용하여 볼 수도 있고요. 그러면 아주 다른 세계가 펼쳐지겠지만 그것은 선택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고 여전히 눈으로 보는 것이죠. 그러나 뇌로 보는 것은 해괴망측하고 황당무계하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이죠.


인간이 그런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면 그 능력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겸허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인데 창조주가 인간이 알 수 없도록 만물을 창조하였음은 명시된 기록이죠.


이처럼 불안정하고 변화무쌍한 것이 만물이나 의식의 본질이죠. 그러나 인간이 감각하는 현실은 요지부동이며 절대안정입니다. 이 세계도 인간이 어찌할 수 없죠. 어느 지역에서 해돋이를 보았다면 다음 해돋이를 보려면 24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어떤 인간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수십 년을 찾아 해 매고 있는 지인이 지구 저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아무리 빨라도 즉 바로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사도 기다렸다가 그것을 타고 그를 만나기까지는 적어도 24시간은 지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시세계의 이와 같은 측면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미시세계와 마찬가지로 전혀 통제할 수 없죠.


인간의 의식은 자유분방하여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데 그런 의식의 성질을 아무리 이용해도 현실을 원하는 대로 변화시키는 못하는 어쩌지 못하는 명백한 한계가 있고 거시의 물질세계에서 누구도 어떤 무엇으로도 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지금도 기적이라고 할 만큼 현실을 변화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측면과 아닌 측면을 분별하여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일시 그렇게 할 수 있었죠. 즉 물 위를 걷는 것이 그의 현실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의식에 두려움이나 의심 같은 부정성이 깃드는 순간 물에 빠지는 것이 그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의식은 지금의 현실을 기적이라고 할 만큼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측면이 있고 그런 원리를 현재도 활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꼼짝하지 않는 그런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의식적 노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비약이 없고 점진적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그런 세계이죠. 하느님의 왕국의 통치자들은 의식이 최고 수준에 있는 144,001 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천년 통치에 의해 인간은 완전하게 지구는 낙원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주기도문에 앞부분에 그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기도를 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으로 즉각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현실이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은 현실이 있는데 그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을 지녀야 좌절과 혼란이 없이 영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jPK26OW7wU&list=PLWlSeFSMCB35Ww6hk1ysGgLtLarvbT_oH&index=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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