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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상학

성적으로 자유로워야

by 법칙전달자

성적으로 자유로워야


예수는 본격적인 전파활동을 30대 초반의 나이에 하였습니다. 젊은 남성이었죠. 그는 일대일로도 여인과 장시간 대화 나눈 기록이 있고 여신도들과도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냈습니다. 부활 뒤에는 여신도 중 한 사람이 그의 몸을 꼭 붙잡았다는 기록이 나오죠. 그는 모든 여인을 절대적으로 순수하게 동료인간으로서 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주변에서 이련 면에서 그를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변에 기존 권력자들 중에는 어떻게 하면 그를 걸어 죽일까 구실을 찾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이 많았죠. 거짓증인들도 많이 있었고요. 그런데 예수에 대해서 그런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면은 실마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즉 거짓 증인을 세워 이 사람들이 그러는데 당신이 막달라마리아와 팔짱을 끼고 요단강변을 거닐다가 숲으로 들어갔다는데 숲 속으로는 왜 간 건데? 하고 트집 잡으며 그런 쪽으로 죄를 만들려는 시도를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거리낌 없이 여인들을 가까이 접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쪽으로는 씨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반대자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모든 면으로 흠잡을 때가 전혀 없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을 하느님이라고 했다고 하여 신성모독으로 고발하는 그것뿐이었죠. 로마의 법에도 조금도 저촉되는 것이 없어 빌라도도 무죄로 풀어주려고 하기도 하였죠. 예수는 성적으로 비순수한 면이 조금도 없는 그런 면에서도 완전한 본이 되었죠.


성서 룻기에도 룻이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거적에 누워 쉬고 있는데 롯은 그의 발치에 누웠고 보아스가 이를 알아차리자 룻이 그에게 자신을 취하라고 한 적이 있는데 이런 행동이 룻이나 보아스 측에서나 순수하지 못한 육적인 것이 조금도 곁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만큼 그들의 의식 수준이 높았던 것이죠.


반면에 다윗이 밧세바의 목욕장면을 보고 생긴 의식은 성적으로 범죄적인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상처 후에 성적인 욕구를 채우려고 어느 지방에 창녀와 관계를 하였는데 그 여자는 바로 그런 때를 기다라고 있다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그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녀는 그의 셋째 아들을 자기에게 남편으로 주겠다고 한 약속을 유다가 지키지 않자 그런 획책을 하였는데 시아버지와 가진 이 행위에 대한 순수성과 정당성은 장담할 수 없는데 거기서 난 아이가 예수의 조상이 되었죠. 룻의 두 딸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관계를 하여 자녀를 가졌는데 이 경우도 관련된 내막, 그녀들의 성정에 대한 모든 것을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으니 그 도덕성에 대해 단정을 할 수 없겠습니다만 그 당시에 후손을 갖는 일을 중요성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는 어떤 불순한 동기로 만지는 것 자체라 죄라고 하고 예수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간음이라고 하고 있죠. 남자가 여자를 강간한 경우에도 여자가 극렬하게 거부하고 소리 지르지 않았다면 그 죄에 동참한 것이 되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죠.


오늘날도 여자들은 남자들의 웬만한 행위를 성추행, 성희롱으로 걸어서 합의금을 요구할 수 있어 남자들도 이점을 인식하여 조심하는 경우가 있죠. 문제는 동기 문제입니다. 이 점에 있어 여자의 직관력은 뛰어나서 접근하는 남자들의 동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죠.


자연스럽고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접촉을 통해 은밀한 짜릿함을 느껴보려 하는 경우도 많은 데 모종의 쾌감이 있기 때문에 여간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면으로 자유롭기가 쉽지 않은 것이 오늘날의 세테입니다. 이성을 성적으로 보지 않고 동료 혹은 가족으로 보는 시각이 절실히 필요하죠.


한 지붕 밑에서 자라온 경우 성인이 되어 같은 방에서 잤다 해도 전혀 성적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것이 정상이죠. 여자들인 경우 어떤 상황에서는 믿을 수 있는 것은 친아바지밖에 없다고 하는데 턱 믿고 몸을 기대고 잠을 자기도 하는 것입니다. 친 오라버니나 아버지인 경우 성적으로 불순한 생각 전혀 없이 그 여성가족성원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지원하죠.


어쨌든 배우자 이외에 이성에 대해 정신적, 감정적, 신체적 모든 관련은 불순하고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실제로 밀접한 신체접촉이 었었다고 해도 동기문제입니다. 약간 부자연스럽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상황에서 살짝 접촉한 것도 성추행이 될 수 있는 것이죠. 반면 산부인과 의사가 환자가 이성이라 해서 접촉이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가 되죠. 그는 직무상 깊숙한 곳까지 터치해야 하는데 이를 조금이라도 비난의 시각으로 보지 않죠.


성적 비순수함은 비율은 적겠지만 여성 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힘이 약하고 수동적이니 비난을 덜 받을 수 있어도 동기의 불순함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성적인 자유함에 있어서 예수나 그의 충실한 제자들처럼 그렇게 되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서 어떤 보람 있는 큰일을 하려면 성적인 자유는 필수입니다. 어떤 성적으로 매력을 물씬 풍기는 이성을 접하더라도 성적으로 느끼는 일이 없어야죠. 아니 도리어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이성이라면 역겨움을 느낄 것입니다. 의식 수준이 높아 이처럼 성적으로 자유로운 경지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죠 그들은 순수하게 영적인 형제자매로서 연합하여 공동으로 선한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성적인 쾌락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배우자와는 극도의 성적인 환락을 누리고 있어도 다른 이성과는 전적으로 순수하게 형제자매이며 동료인 것이죠. 이러한 성적인 지유가운데 인간 사회는 정상적으로 발전하는 것이겠죠.


다행인 것은 오늘날도 공적으로는 이런 원칙이 적용되어 성적으로 불미스러운 행적이 드러나는 사람은 바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불명예에 처해지죠.


인간은 다른 면으로 뿐 아니라 성적으로도 크게 잘못되어 있는데 그 점에 있어서 시정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관련된 위와 같은 원칙을 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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