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불쌍하다
유능한 사람이 되려면 행동성과 사려성 모두를 두드러지게 갖출 필요가 있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려성이 극단적으로 두드러진 사람의 예는 헴릿인데 그는 돌다리를 몇 번 두들겨보고 안전함을 확인하고도 혹시나 해서 그리 가지 못하는 사람이죠. 어찌할까 하고 생각의 생각만 거듭하는 사람이죠.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우유부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행동성에 있어서는 돈키호테를 꼽습니다. 일단 그는 충동대로 막무가내로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것이죠. 먼저 행동부터 해놓고 수습은 그 이후에 생각해 보는 것이죠. 행동성과 사려성은 대립되는 특성이라 양쪽을 동시에 갖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는 탁월한 사람이죠.
바로 사도바울이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때의 최고의 교육기관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나중에 총독이나 왕, 재판관이 된 사람들이 그 문하 출신이었죠. 그들과 친구관계였기 때문에 나중에 그들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너 너무 공부 많이 해서 정신이 이상해진 거 아니야?라는 비평을 받을 정도로 사려성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이는 그의 필서를 통해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한편 그는 예수의 추종자들을 박해할 때 선봉에 서서 주도적으로 그렇게 하였죠. 그는 행동에 앞서는 그런 사나이였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을 두드러지게 갖는 것은 큰일을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죠.
그가 박해를 위해 동료들과 가는 와중에 예수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를 개종시킵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동기를 본 것인데 이는 그 당시 종교나 정치의 고위층에 있는 사람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리새파였는데 율법에 열심히 있고 율법에 의하면 모세의 말을 거스리는 사상을 전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죽이라는 말이 있죠. 스데반도 그런 이유에서 살해당하였고 그 상황에 그도 개입하였죠. 그는 모세의 율법이 하느님의 법이라고 순수하게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기적적인 방법으로 개종하게 되었는데 이는 에수 사후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 사이의 몇 십 년간 창조주의 시대들의 계획에 따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 있었는 제 예수의 열두 제자를 비롯하여 수백의 제자들로는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는 '되게 한다'이죠 어떻게든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은 하는 분이고 사도바울과 같은 인물이 그 일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죠. 그리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 사도바울의 동기의 순수함과 그 열심과 지적 능력을 보신 것이죠.
아무튼 사도 바울은 전파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라고 표현한 것은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참 숭배의 조직에 대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상 종교조직이 될 수 없고 하느님의 말씀은 종교교리가 될 수 없는 것이죠. 편의상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 중 주요 부분은 부활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영생을 하게 되는 사람이 없는 때였죠. 오늘날 부활은 영혼불멸이나 천당지옥과 같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와 상충되기 때문에 소위 기독교인들은 성서에 여러 번 명시되어 있는 이 지식에 대해 무지합니다. 죽으면 바로 그 영혼이 계속 살아 천당이나 지옥 혹은 연옥 같은 데 간다고 하기 때문에 부활은 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죠.
부활은 그 당시에도 여러 파벌과 논쟁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부활이 없고 현생뿐이면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부활에 대해 길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논증하였습니다.
오늘날 성서 대신 과학을 믿는 사람들은 과학이 그렇게 해줄 수 있다고 기대하고 시체를 냉동보관하고 있죠. 또 홀로그램이론이나 아카식레코드 등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인간에 대한 정보가 저장된다고 하여 부활의 과학적 가능성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죽어왔으나 얼마 후 몇 백 년간은 아마도 수백억의 부활이 있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천년 끝무렵에 대대적인 죽음이 있은 후에 죽음이라는 원수는 인간사에서 사라지게 되죠. 조금만 조사해 보아도 의문의 여지없이 그렇게 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