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격차로

by 법칙전달자

더 큰 격차로


작품의 가치가 클수록 그 창작자는 더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죠. 음악이나 그림에서도 그렇고 원리의 발견이나 기기의 발명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술계나 학계의 거장이나 저명인사들의 이름을 상당수 알고 있고 그들의 유명한 작품이나 이론의 이름이라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행기나 전화의 발명가의 이름 정도도 아는 경우가 많죠.


베토벤의 월광을 듣고 어떻게 그런 곡을 작곡할 수 있는지 찬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성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였다면 아인슈타인을 깊이 존경할 수밖에 없고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한다면 칸트에 대해서 그러할 것입니다. 밴허의 감독은 내가 어떻게 그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나도 놀랍다고 하는 것이죠. 저도 여러 명의 작곡가나 작가들을 깊이 존경합니다.


그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작품은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모든 업적들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죠.


창조주의 인간 청조의 업적은 어마어마하여 그 영광의 희미한 여광이라도 감당하기 힘든 것입니다. 우주 전제를 인간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죠. 특히 자유의지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인간이 위대하면 할수록 창조주의 위대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특히 피조물에 반영된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느낄 때 그 찬양의 마음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창조물에 반영된 지혜와 사랑을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창조주에 대한 경외감이나 숭배심은 더 깊어지고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것이 더 당연해집니다.


인간이 위대하다고 느낄수록 창조주는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것인데 그런데 인간은 창조주가 단독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가 전적으로 홀로 창조한 것은 예수이죠. 그래서 그를 독생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천사를 만들고 우주와 만물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죠.


예수 자신은 이점에 있어서 어떨까요? 그는 공동창조주이지만 피조물이죠. 그분의 하느님이자 아버지인 창조주와의 격차를 우리 인간이 창조주에 대해서 느끼는 격차보다 훨씬 크게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보다 더 큰 경외감과 복종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죽기 끼지 충성하고 임의로 말허가나 행하는 것이 전혀 없이 오직 창조주의 뜻만을 전적으로 전하고 행한 것은 한편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조금이라도 과장되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죠. 천사들도 그와 비슷하게 행했죠.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화신 하여 인간에게 접근했을 때 그에게 절하며 경외의 뜻을 나타내고자 한 인간에게 만류하면서 나도 당신과 같이 하느님의 종일뿐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일부 인간들은 자신을 신처럼 높이고 또 사람들은 그러한 인간을 신처럼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인간은 스스로 신과 같은 존재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죠.


물론 인간 내면에 신과 같은 위대함이 내재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인간의 의식기능에 가장 큰 신성이 반영되어 있기도 할 것입니다.


사탄도 이를 잘 알고 있죠. 그러므로 인간은 신과 같아서 독립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고 대다수의 인간도 이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죠.


결과는 처첨하지만요. 인간 세상을 볼 때 누가 실제로 신과 같은 상태를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까? 창조주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명백한 실패입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도 진정으로 창조주를 사랑해서 숭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도전도 실패했죠. 극소수이긴 하지만 욥과 같은 인물들이 있어왔고 오늘날도 천에 하나는 그러합니다.

진리를 알면 그것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것으로 선언되어 있죠.


아직 이 진리를 진지하게 검토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딜레마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