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상학

유익한 부정적인 감정

by 법칙전달자

유익한 부정적인 감정


고통, 슬픔, 외로움, 두려움, 분노, 후회, 죄책감, 패배감, 암담함, 소외감, 배신감, 공허감, 절망감, 역겨움, 수치심 등등 언뜻 생각나는 부정적 감정과 관련된 몇몇 어휘들인데 자세히 조사하면 이 수십 배는 족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감정에 대한 어휘보다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 중에서 몇 가지만 들어 부정적 감정이 유익을 주는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부정적 감정이란 인간이 그렇게 느끼도록 창조주가 넣어준 것이기도 하니 그런 점이 있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더는 고통이나 슬픔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지만 그것은 해로운 고통이나 슬픔에 한한다고 보아야죠.


먼저 슬픔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와 같은 슬픔은 그런 일이 발생되지 않으므로 그런 슬픔을 겪을 일은 없겠죠. 자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거나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는 것은 충격적인 슬픔, 감당치 못하는, 청천벽력과 같은 슬픔이 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무겁게 다루어지는 이유이죠. 이는 큰 고통이기도 하고 죽음보다 오히려 고통이 삶의 반대 이기고 한 것이죠. 큰 슬픔의 후유증은 사망의 원인이기도 하죠.


그러나 징계받을 때의 슬픔, 자녀가 부모에게 사랑의 종아리 매를 눈물을 흘리면서 맞는 그런 슬픔이 있고 애완견이 죽었을 때의 슬픔이 있는 것이죠. 비숫하게 닮은 그 새끼를 키우면 되긴 하지만 그런 식의 슬픔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정화작용을 하는 소위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유익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있고 어떤 스트레스는 있어야 하는 것이죠. 숲을 거닐다가 들짐승을 만났다면 다리 같은데 스트레스가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빨리 달릴 수 있죠. 안전지역으로 오면 원상복구 되는 것이죠.


아담이 하와를 만날 때까지는 동물의 이름을 지으면서 그 가운데서 반려를 찾으려 했지만 적합한 대상을 찾지 못했습니다.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창조주도 인간이 혼자 있는 것이 안 됐다고 하면서 하와를 만들어 그에게 건네었을 때 그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죠. 일종의 결핍감은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그 가치를 더 강하게 느끼게 해 줄 수 있으므로 유익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죠.


고통 혹은 괴로움은 뉘앙스도 다르고 부정적 감정의 큰 범위를 망라하고 있지만 감각적 고통은 인간에게 통각이라는 세포 때문에 생기죠. 머리카락이나 손발톱 혹은 어류 이하의 하등동물에게는 그것이 없어 칼로 자르거니 불에 타도 아픈지 모르죠. 그러나 손이 불에 들어가도 아픈지 몰라 그대로 두면 못쓰게 되므로 이런 고통을 느끼는 기능이 있는 것은 유익하다고 할 수 있죠. 감정적으로도 괴로움이 되는 경험을 했다면 그것이 더 심화되지 않게 어떤 행동을 중단하게 되어 유익하게 작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번 글에서 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것입니다. 두려움에는 그것이 두려움인지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이것의 지배를 받을 때 본질적인 해를 입게 되죠.


보통 인간이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웬만하면 뜻을 관철할 수 있죠. 그래서 비굴하게 구차하게 생명을 조금 연장하려고 그런 식의 타협을 했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하죠. 어차피 죽게 되지만 때 이르게 죽게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 자체보다 그전까지의 고통이 더 두렵다고 하는 경우도 많죠.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는 것을 병적으로 겁내하는 것이죠. 그래서 단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면서 죽게 하여 공포심을 조장하는 경우가 많이 있고 고대에 그런 형벌이 많이 있었죠. 특히 증오의 대상을 죽일 때 그렇게 해왔죠. 생각만 해도 겁나는 일이죠.


예전에 손자가 왕이 그가 얼마나 군사훈련을 잘 시키는지 보고자 하여 그의 애첩들을 훈련시키라고 했죠. 그러나 그녀들이 말을 잘 들을 리가 없죠. 그래서 왕의 가장 큰 총애를 받고 있는 애첩 둘의 목을 잘랐죠. 그러자 나마지 여자들이 일사천리로 움직였다는 고사가 있죠.


꼭 이러한 죽음뿐 아니라 보통 의식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기준을 벌을 받는지의 여부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죠. 오늘날은 소위 인권 개념이 발달하여 벌이라는 것이 가두는 것이지만 예전애는 더 다양했죠. 그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했던 것이죠. 두려움이 행동의 동인이 되는 것이죠.


죽음이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정상적인 것 같지만 병적으로 그런 두려움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에게 갖으라고 하는 두려움은 사랑에 입각한 것이죠. 정말로 깊이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혹시나 그를 언짢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조심, 일종의 두려움일 수 있는 그런 두려움을 가지라는 것이죠. 건전한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연구가들은 좀 의아하게도 두려움을 의식의 닫혀있음으로 정의합니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 면으로 세속적인 가치관에 세뇌되어 그것에 정착되어 사실상 노예문화에 적응이 되어 있죠. 그러한 가치관이 틀린 것이라는 것이 증명이라도 되면 변화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을 수 있어 그것이 싫은 것이죠. 그러므로 그럴 가능성이 감지되는 그런 메시지에 대해 귀를 막고 외면하는데 바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차원의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런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일시적인 고통이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을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한다는 면에서 자신에게 그런 두려움이 있는지 심각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가장 해로운 두려움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도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겪으면서 인간은 성장하게 되어 있죠. 또한 건전한 두려움 같은 것은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도 없죠. 증오, 시기심, 적개심과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해롭고 악한 감정들도 있죠. 해로운 감정만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할 때 특히 두려움과 관련하여 자신의 내면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성서에서 전달되는 메시지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드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아(pr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