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상학

세헤라자데와 이발사

by 법칙전달자

세헤라자데와 이발사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렇게 주어졌기 때문에 코로 호흡을 하면서 삽니다. 밥도 먹고살고 팔로 걷지 않고 다리로 두 발로 걷죠.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죠.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이 모든 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최고지성의 설계에 의한 것이죠.


만들어 진대로 하지 않으면 매우 괴롭거나 죽게 되죠. 태어나서 부모나 가정교사 혹은 교육기관의 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죠. 그 와중에 감성이 개발되면서 음식이 맛있다고 하고 꽃이 예쁘다고 하는 것이죠. 노래 부르고 춤을 추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술래잡기 놀이를 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하는 것이죠. 나비가 예쁘고 강아지가 귀엽다고 하는 것이죠. 이 모든 것도 설계된 대로이죠.


칭찬을 받으면 기뻐하고 야단을 맞으면 슬퍼하죠.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으면서 뭔가 깨달으면 의미 있어하고 신기해하기도 하죠. 이야기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어하고 할머니한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기도 하고 친구들한테 그 얘기를 전해 주기도 하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인간의 신체뿐만 이나라 의식의 발전과 그 사용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인간은 창조주에 의해 설계된 대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죠. 입력된 본성대로 하는데 그것을 거스르면 괴로움이나 욕구불만이 생기죠. 그런 것에 순응해야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한 것이죠.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간은 말하고 싶은 욕구와 듣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욕구가 만족스럽게 해소돼야 마음이 편한 것이죠. 여자는 하루 6,000 단어, 남자는 2,000 단어 정도를 구사해야 편하게 잠을 잘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예레미아도 자신이 알게 된 진리를 말하지 않고서는 뼈가 타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조롱과 박해를 받을 것이 뻔한데도 그렇다는 것이죠.


이 두 욕구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천일야화와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이야기죠.

결혼하고 하룻밤 지내고 죽이는 왕이 있었는데 한 신부는 밤에 왕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후 그 절정에서 중단하여 왕이 몹시 궁금하여 죽이지 못하고 그다음 날 밤 이야기를 이었고 또 마찬가지로 하여 천일이 이어졌다고 하죠. 듣고 싶은 인간의 본성을 잘 나타내주죠.


또 하나의 이야기는 당나귀귀인 왕이 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머리를 깎을 때마다 이발사를 죽였는데 하나 남은 이발사마저 죽일 수 없어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다짐을 하게 한 후 살려 주었는데 그런데 이발사는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 대나무밭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소리를 질렀다는 것인데 왕이 그 근처를 행차할 때 그 소리가 들려 드디어 왕관을 벗고 신하들한테 이를 개방했다는 것인데 인간의 말하고 싶은 욕구를 잘 보여 준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잘 알려진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기기를 사용할 때 컴퓨터나 휴대폰을 사용할 때 그 구조나 원리를 몰라도 사용법만 알면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죠. 자동차도 그렇죠. 어쨌든 사용법이란 그 기기의 존재목적과 일치한 그런 것이죠.


말하려는 본능과 들으려는 본능이라는 이 기기 즉 장치는 어떠할까요? 그것이 만들어진 목적 그것이 그렇게 주어진 목적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그렇게 사용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또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듣는 것도요. 그렇지 않다면 내용과 방법에 있어 그릇되게 표현하거나 접하게 되고 이는 자신이나 남에게 큰 해가 되는 그러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불순한 목적으로, 그렇지 않더라도 옳지 않은 내용이 담긴 말이나 글들이 난무하죠.


어떤 원칙에 따라 선택적으로 쓰고 보고 해야 하는 것이죠. 물론 내용이 잘못된 것인지 알면서 뭔가 영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상대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서 그가 갖게 된 사상이 담긴 글들을 보게 될 수 있죠. 이는 그것으로부터 피해를 볼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죠.


글을 쓰는 것이 사상을 표현한다는 면에 있어서 말하는 것과 본질상 같은 것이라 할 때, 글을 보는 것과 듣는 것도 그러한 것이라고 할 때 내용과 방법에 대한 기준은 당연히 창조주가 정하는 것이죠. 그 표준들이 성서에 있으며 성서를 매일 읽으라는 것과 같은 기준이 있는 것이죠. 글이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전하려 하는 경우가 많은 데 관련된 기준을 정확히 하여 이를 적용시켜 취사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쓰인 글들은 논문 같은 공식적인 것부터 개인의 신변잡기에 이르기까지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죠. 과연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라는 원칙 즉 진리가 온전히 담긴 것 그리고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고 선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진정한 유익을 주는 그런 글들이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또 자신이 글을 쓸 때 정성을 들이고 정선해서 기도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일까요?


글을 쓰거나 보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의식과 관련하여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마치 자기 물건을 임의로 혹은 재미로 다루는 것처럼 그렇게 막 사용하여 영혼의 성장 혹은 의식의 발전, 삶의 목적의 진전 없이 인생을 소모하는 것이 아닐까요?. 시간을 내서 이러한 점을 엄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글을 쓰거나 읽는 것과 관련된 이 신성한 것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나 선물과 같은 것이어서 함부로 사용하면 인생 자체가 파국으로 끝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을 준 존재에게 모독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관련된 창조주의 기준을 자세하고 명확하게 알아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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