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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죽고 말지

by 법칙전달자

차라리 죽고 말지


10대 때의 일인데 버스에 두 남학생이 있었고 뒷자리에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너 저런 할머니 하고 결혼하라고 한다면 어떻겠냐 하고 묻자 그 학생은 차라지 죽고 말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0대 때 처음으로 양로원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치 무덤이 연상되었거든요.


요즘은 인구의 반이상이 예전이라면 장수하는 것이라고 하는 환갑이상이라고 하죠. 산을 가보면 만나는 사람이 대부분 그 연령대입니다. 노쇠가 자연스럽고 익숙해지게 되는데 사실상 끔찍스러운 재앙인 것입니다. 저주의 결과인 것이죠. 특히 인간의 노쇠는 그러합니다. 늙으면 죽어야지 하는 것이죠. 일단 모습이 추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젊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반면 백발은 노인의 영화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젊은이의 그것에 비해 경륜과 지혜가 그러하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그가 쌓아온 의를 바탕으로 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동물의 노쇠인 경우는 인간처럼 그렇게 두드러지게 추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쟤는 이제 죽을 때가 다 됐어라고 하면 유심히 보고 그런가? 하고 생각되기도 하는 것이죠. 곤충인 경우에는 늙은 것인지 거의 알 수도 없죠. 결국은 죽어 시체가 된 경우에도 가끔 보는 새의 시체나 곤충의 시체 같은 경우도 그렇게 역하게 느껴지지는 않고 대개 바로 처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노쇠는 뭔가 부조리하고 억울한 면이 있는데 과학적으로도 그 못마땅하고 불합리하게 생기는 노쇠의 원인을 밝혀 내지는 못하고 텔로미어라는 세포가 짧아지는 것이 원인이라고도 하는데 그 세포를 아무리 길게 해도 늙고 죽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합니다. 그래도 사람은 곱게 늙다가 아프지 않게 편하게 죽는 것을 소원으로 하죠.


어머니의 뇌졸중으로 중환자실에 잠깐 있은 적이 있었는데 고2여학생이 뇌막염으로 무의식 상태로 중환자실에 있었습니다. 의사가 오더니 이미 폐가 썩어 물이 줄줄 흐르고 있어 전혀 가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는 웃으면서 농담 식으로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환자가 간 후에 다른 환자보호자들이 욕을 하는 것이었죠.


그 선언을 들은 후에 그 어머니는 그렇게 한 없이 통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들도 문병 와서 슬프게 울었죠. 곧 영안실로 가게 되었죠.


나이가 들면 여자들은 여러 가지 병치레를 많이 하고 곧 죽을 것 같이 아프다고 하다가도 수술을 받거나 하여 수명을 연장하는데 골골 장수라는 표현이 있기도 하죠. 남자들보다 한 10년 정도 오래 산다고 하죠. 병원 가기를 기피하다가 심상치 않아 병원에 간 한 50대 초반의 남자가 있었는데 간암 말기라고 하고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의사가 자신 있게 확정적으로 그렇게 말할 경우 거의 정확하게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술고래에 난봉꾼이었고 그의 아내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런 사실을 친구들에게 말하는 그의 아내의 표정은 흐뭇 그 자체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노쇠, 질병, 죽음 더구나 때 이른 죽음은 워낙 많아서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의 인간의 평균수명은 19세에서 20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최상의 식품을 섭취하고 최고 의료진을 곁에 두었던 왕들의 수명도 대체로 단명이었죠.


결론에 이를 즈음입니다. 천상에서 영적인 존재들도 인간의 이러한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겠죠. 여호와는 그의 독생자인 예수에게 인류를 노쇠나 질병, 죽음에서 구출하려면 너의 생명이 필요한데라고 하였다면 자기 자녀의 시체를 붙들고 통곡하는 부모들의 울음을 보고 아마도 동정심에 의해서라도 예, 제가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창조주는 철저히 처음에 만들었던 법칙에 따라 만사를 운영하죠. 어떤 경우에도 그 점에 융통성을 두지 않는데 이 또한 철칙입니다.


자유법칙과 유전법칙을 두었죠. 하와는 선악과를 자신이 먹고 그것을 남편에게 주어 다 먹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떤 제제도 받지 않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의나 경고도 받지 않았죠. 가인도 그 동생 아벨을 죽이는 행동을 다 끝낼 때까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죠. 비행기 조정사를 위협하여 두 개의 고층빌딩에 충돌해 그것들을 파괴하고 무고한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게 한 그 행동도 완료되기 전까지 자유롭게 그렇게 할 수 있었죠.


인류 전체에게 노쇠와 질병과 죽음이라는 끔찍한 재앙을 6,000년가량이 있게 한 원인이 첫 인간 부부의 원죄라면 그러한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데도 그 원인에 해당되는 행위는 조금의 제지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유전법칙도 어김없이 적용되어 그 재앙이 무고한 후손들에게 미쳤죠.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직접 지은 죄가 아니므로 참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금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록들은 신화로 여겨지면서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지만요.


창조주가 만물을 운영하는 특히 인간사를 운영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참작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죠. 멸망도 하나의 법칙입니다. 애초에 그런 법칙으로 의식 있는 존재들을 만든 것이고 죽음을 선택하는 존재는 죽인다는 것이죠. 성서에 명시되어 있죠. 생명과 사망은 피조물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자유의지를 확고하게 사용하여 죽음을 택한다면 죽게 하는 것이죠. (신명기 30:15~20) 그런 면에서도 창조주가 하는 일은 완전합니다. (신명기 32:4) 멸망도 하나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도 그 법칙이 준수된다면 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어떠할 것입니까? 창조주는 그 목적을 실패하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이 실패처럼 보여 사람들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정도이죠. 그러나 목적도 하나의 법칙입니다. 창조주는 인간의 선택에 대해 바로 대응을 했고 그것이 바로 동가상응에 법칙에 따른 대속물이고 회복을 위한 왕국의 마련이죠. 성서는 이를 알리기 위해 쓰인 책이죠.


그의 아들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이 뻔이 예상되는대도 그 법칙에 고착하여 독생자를 고생시키고 희생시켰죠.


이미 천적 정부의 왕으로 즉위에 통치를 시작했고 천년통치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고 있죠. 영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인간이 현실이라고 하는 그 어떤 현실보다 실제적이고 강력한 현실입니다. 단 인간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할 뿐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 역시 스스로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스스로 눈을 감고 외면하는 결과이죠. 멸망의 법칙이 자신에게 적용될 때 후회하는 것은 늦었습니다. 법칙이라는 것은 참작 없이 적용되죠.


멸망과 관련해서는 성서에서 노아의 홍수를 예를 들죠, 방주에 타지 않았다면 그가 아이이건 임산부이건 지혜자이건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건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죠. 익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법칙에 의해 의롭고 온유한 순종적인 사람들은 이 땅에서 노쇠와 질병과 죽음을 겪지 않고 원래의 창조목적에 따라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노쇠라는 비극 혹은 재앙은 극히 일시적으로 잠깐 있다가 지나가는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을 들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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