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 넓히기
인간이 자라면서 의식이 성장하면서 어느 순간에 소중함을 처음으로 인식하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가족에 대해 그러함을 느끼는 때가 있죠. 자연스럽고 편하고 믿을 수 있죠. 한 지붕 아래 사는 2촌 이내의 친혈통에 대해 특히 그러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요청하기에는 부담이 되거나 무례하기까지 할 수 있는 봉사를 별 부담 없이 요청하기도 하죠. 타인에 대해서는 느끼지 못하는 그러니까 배타성이 있는 그런 의식상태이죠. 뭘 거저 받아도 당연하다는 듯이 감사를 표명하지 않아도 비난받지 않죠. 웬만한 결례 같은 것은 간과되며 좀처럼 미움 같은 것은 생기지 않는 그런 관계이므로 소중하다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뭔가 그냥 주면서도 전혀 아깝다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보람을 느끼는 그런 관계이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가 자신의 가족이라고 소개하면 의례히 그런 관계를 누리겠구나 하고 무의식적으로 짐작하게 죄죠.
예전의 왕들도 다른 사람이 저질렀다면 중벌을 내릴 그런 행동에 대해서도 자신의 이들일 경우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한 것을 알 수 있고 주변에서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가족이 아닌 타인일 경우 죽여서라도 그의 것을 빼앗아 가족에게 선물하는 그런 배타성 심지어 불의 혹은 범죄성이 수반되는 그런 관계일 수 있습니다.
혈연이 아니다라도 소위 절친인 경우도 상황은 비슷할 것입니다.
아무튼 특별히 소중하다고 느껴지는 극소수에 해당되는 그런 인간관계들이 있죠.
그런데 인간의 의식은 자유이고 상상의 지대한 영향을 받죠. 생면부지의 대상에 대해서도 일거에 그러한 관계가 되게 할 수 있죠. 또 그렇게 하라고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실제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분이 청중에게 연설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제자들이 이를 알리자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에 대해서 특별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인기를 얻으려는 구호의 차원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실제 그렇게 느꼈고 또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인간관계에 대한 의식을 말씀하신 것이죠.
오늘날도 실제로 그런 의식 상태를 가진 수백만의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그 순간부터도 친혈통이상의 그런 친밀함과 신뢰감을 느낍니다. 마음에서 진실로 우러나오는 사랑의 친절을 나눌 수 있죠.
물론 인간의 교육을 통해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창조주의 실제적인 교육을 통해 그것이 가능해진 것이죠.
아무튼 인간의 의식은 동료인간에 대해 그런 의식을 실제로 가질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갑자기 비약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인간관계가 그의 현실이 되는 즉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그런 축복을 현재에도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