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랄체
영혼이라는 혼란스러운 관념이 있습니다. 문맥에 따른 의미도 매우 많죠. 영어 soul도 비슷합니다. 그냥 혼 이라고도 하고 혼백, 혼령이라는 말도 사용되죠.
4차원을 영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죠. 4차원과 3차원의 관계를 3차원과 2차원의 관계에 빗대 설명하죠. 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서로는 그 외곽의 곡선만을 볼 뿐이지만 3차원에서 보면 그 내부의 모든 것을 빼놓지 않고 다 볼 수 있죠. 두께가 없으니 100% 3차원의 존재에게 개방된 상태이죠. 그러나 그들은 3차원을 전혀 볼 수 없죠. 만약 2차원이 찢어져 2차원의 사람이 가다가 그 찢어진 곳으로 빠지게 되면 그는 2차원에서는 없어지고 3차원의 존재가 되죠.
신들 혹은 영적인 존재가 거하는 영계가 바로 4차원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영혼의 핵심쟁점은 그것이 육체를 이탈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립된 시각이죠. 혼이 몸을 분리해 나가 이데아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관념은 플라톤이 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이 이원론을 바탕으로 기독교교리가 만들어졌죠. 기독 즉 그리스도교 교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죠.
불교에서는 무시무종으로 윤회한다고 하죠. 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경지가 열반이라고 하죠.
인간의 지적 호기심은 강력하여 어떻게든 답을 얻어내려고 열렬히 노력한 결과 구축된 이론들이고 다른 시각들도 있죠. 그러나 모두 진리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서에서는 오묘한 것은 하느님에게 속하고 밝혀진 것은 영원히 인간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신명기 29:29)
영혼의 이와 같은 쟁점, 아스트랄체나 유체이탈 같은 상상은 밝혀진 즉 확립된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영과 혼은 분명하게 구별된 개념으로 사용하고 영혼은 생명이나 생명을 지닌 존재를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동물들도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고 죽으면 영혼이 죽는 것이고 무의식 상태가 된다고 하죠. 이것이 창조주가 영혼에 대해서 인간에게 밝힌 개념입니다.
단 그의 개성이나 기억은 저장된다고 하는 개념을 전합니다. 나중의 부활을 위해서죠. 그러므로 죽은 사람은 그때까지 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서에서는 죽음을 잠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위의 주장들은 거짓이죠.
오늘날도 영 혹은 혼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소위 다양한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어서 그 모든 것이 소멸되면 무슨 의미입니까?
인간은 주제넘게 사실상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상상을 하며 뭔가 아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겸허하게 창조주, 창조의 법에 순응하여 우선 살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니까 혹은 죽는다 해도 손해 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창조의 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창조주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죠.
창조주 혹은 창조에 대해 조사해 보면 볼수록 그 매력 때문에 사랑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죠. 또한 창조주에 대한 사랑은 동료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런 사랑(아기페)이 형성되어 있지 않죠. 여러 철학의 영향이죠. 또 이 사랑 자체도 매력의 대상입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순종심을 갖게 되는 것이죠. 두려움이라면 그 사랑하는 분을 불쾌하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건전한 두려움이고요.
사랑도 여러 시각에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열린 상태라는 정의도 있죠.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도 일종의 철학입니다. 창조주로부터 나온 것이 결코 아니지요. 창조주의 언명은 성서에 있는 것이니까요. 겸허하고 겸손한 사람들은 이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이 더 옳다는 사실상의 교만한 상태에 빠져 말씀에 대해 마음을 굳게 닫아버리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