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죠
인간은 뭔가 알고 싶어 하며 또 뭔가 알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압니다. 인간은 뭔가 먹고 싶어 하고 또 그러하다는 것도 압니다. 이 두 문장에서 '싶어 한다', '안다'라는 한국어 단어가 쓰였죠. 즉 생각을 나타내는 목적을 지닌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언어로도 같은 뜻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언어는 달라도 생각 혹은 언어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같다는 것도 압니다. 이처럼 그러한 점들을 밝혀 의식적으로 그런 점들을 인식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관련 작용이 있게 되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삶을 지향합니다. 즉 위와 같은 신기한 현상들을 경험하면서 살고 싶어 하죠. 그것도 행복한 삶을 지향합니다. 보고 먹고 하는 것은 즐겁죠. 보는 것도 자연을 보는 것과 영화나 드라마 혹은 책을 보는 것, 그림을 보는 것 등이 있죠. 모두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죠. 그 즐거움들은 다 맛이 다른 것들이죠. 듣는 것도 숲에서 듣는 자연의 소리가 있고 음악이 있고 강의나 연설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다 독특한 즐거움의 근원이 되는 것들이죠.
물론 우리가 보고 듣고 알게 되는 것 중에는 즐거움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우리가 몸으로 겪는 것들 중에는 행복의 반대가 되는 것들도 많습니다. 겪고 싶지 않은 것들이죠. 그런 것들도 매우 다양하고 우리가 파하지 못하거나 피할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인간이 그런 삶이라도 유지하려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선 의식주가 필요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하려면 그 이외도 필요한 것들이 많죠.
중략하고 지금 현 상태에서 보통 사람들이 그 필요를 의식하던 그렇지 않던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창조주의 메시지 전달 통로에 의해 선언된 것들을 요약하면 다움과 같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핵심적으로 필요한 것은 창조주와 창조에 대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인식입니다. 이는 혼자만의 철학적 사유 같은 것으로는 결코 정상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성서를 아무리 읽어 보아도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8:31) 창조주께서는 조직하시는 분이며 인간에 대한 교육을 위한 조직이 있죠. 그 마련을 통해 성서공부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당시에도 유대교인들과 서기관들이 성서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줄줄 외우고 있었을 지 모르지만 예수나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만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죠. 진리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교나 다른 파벌들은 오히여 말씀을 자신들의 권익을 강화시키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오늘날의 기독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성서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마련을 통한 성서공부를 통해 삶에 관한 만족스러운 진리를 얻게 되죠.
그리하여 인간이 참행복, 영원한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의식내용이 갖추어질 수 있습니다. 그의 생각은 진리가 되며 그의 마음은 사랑이 되며 그의 몸은 항상 선을 펼치게 되는 것이죠.
다른 무엇,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은 온전하게 피조물입니다. 서두에 언급된 모든 현상들은 그런 기능들이 주어지고 그것이 작동하여 인간이 누리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함을 인식해야 인간은 영속적으로 안정된 풍부한 평화 가운데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