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상학

다시 조명하는 이성과 오성

by 법칙전달자

다시 조명하는 이성과 오성


제가 여러 글에서 자주 다룬 소재입니다. 상대성원리나 순수이성비판은 그것을 실제로 이해하는 사람은 지구 전체에서 손꼽을 정도이고 양자역학은 그보다 더 적을 것이라는 말이 있는 것과 같이 이 번 글은 이전 두 글에 비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과학 쪽은 이해는 못해도 받아들이죠. 그걸 몰라도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죠. 인류는 그런 것을 몰라도 살아왔죠.


이성과 오성이 무엇인지 몰라도 현재의 삶만을 사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극히 소수에 해당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저에게 그랬듯이 삶의 원리를 환하고 강하게 밝혀 주어 미래의 삶에 대한 큰 확신과 현재의 큰 기쁨도 얻게 해 주니 애써 전달하고자 합니다.


우선 오성(悟性)은 용어로써의 understanding(독일어 Verstand)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게 번역하는데 고심의 흔적이 보입니다. 悟는 깨닫다, 이해하다는 의미이죠. 최근에는 지성(知性)으로 많이 번역하는데 지성이라는 말을 듣고 understanding이 연상되기는 쉽지 않죠. 그래도 오성보다는 더 일상적인 어휘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知의 의미는 알다이므로 크게 벗어난 번역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 수 있죠. Verstand를 음역 하여 외래어로 쓰는 것도 적합지 않아 어떻게든 자국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 처음에 그것을 오성이라고 한 것이겠죠.


쉽게는 학문할 수 있는 지적 기능이라고 생각하여 크게 빗나감이 없을 것입니다. 학문의 동의어로 과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죠. 혹자는 인문과학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신빙성이나 권위를 높이 위한 도용이라고 하기도 하죠. 과학의 2대 근간은 논리와 관측인데 관측이라는 면이 미흡하다는 이유에서죠.


아무튼 학문 즉 과학은 크게 인문과학(사회과학이나 미학(예술) 포함)과 자연과학(수학도 포함)으로 나뉜다고 할 때 인문과학은 인간의 의식 즉 보이지 않은 영역을 다루죠, 대상이 인간이라 해도 신체는 자연과학에서 다루죠. 과학에서 진리가 될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요건인 관측은 꼭 직접적이고 시각적인 관측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플랑크상수나 중력상수 같은 것도 직접 관측되는 것은 아니죠. 관측된 결과에서 필연적으로 추리되는 것이기 때문에 관측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죠. 아인슈타인의 경우 빛의 미미한 휨이 고성능 망원경으로 관측이 되었죠. 그러니 관측이란 직간접적인 절대적으로 확실성 있는 감성의 확인인 것이죠.


언어학, 논리학, 심리학 등등이 모두 이에 해당합니다. 언어학의 한 분야인 문법도 어떤 문장이 문법적인지 비문법적인지 하는 것이 얼른 감성으로 확인이 되죠, 매우 비문법적인 문장을 구사하면 듣는 사람의 표정에서 그 이해하지 못함이 당장 드러나죠. 심리학에서 어떤 성격의 말이 상대방을 화나게 할 수 있다고 하면 현장에서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있죠. 화났는지의 여부는 얼굴 표정 등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죠.


이렇듯이 학문이란 어떤 주장의 진위를 직간접으로 확연하게 확인이 될 수 있는 대상에 한한 것이고 그런 성격의 것입니다.


한 때는 지금 인문학에 속했던 것이 크게 철학의 영역에서 연구되었죠. 그러던 것들 중에서 학문의 성격이 확립된 것은 독립되어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과목이 되었습니다. 논리학을 더 이상 철학이라고 하지 않죠. 그리고 학문은 순수하고 건전한 호기심에서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죠. 엉뚱하게 느껴지는 의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지요. 정당한 의심이란 사업거래나 정치적인 연설 같은 데서 진실성을 확인하는데 필요한 것이죠.


지금 제가 쓰고 있는 글이 실제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가 아닐까 하는 황당한 의심은 건전한 의심이 아니지요. 과연 내 손가락은 열개인가 내 옆구리에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몇 개 더 붙어 있는 것이 아니가? 나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낳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은 결코 건전한 의심이거나 창의적인 발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심에서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은 시간낭비이죠. 그런데 순수철학이란 그런 성격의 의심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기원상 학문이 될 수 없는 것이죠.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이 있죠. 종교교리도 결국 철학에서 나온 것이고 기독교교리의 90%가 철학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종교교리나 철학은 그 진위를 판단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점도 법칙으로 잘 확립되어 있죠. 인생의 궁극의 목적을 감성으로 확인할 수 있나요? 인간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부정적인 결과이죠. 그래서 죽기 위해 산단말인가 하고 답을 내지 못하는 것이죠.


무엇이 도덕의 완전한 표준 인가와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감성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그 점에 대한 지식을 인간이 내어 놓을 수 있나요? 그럴 수 없죠. 중력의 존재는 감성으로 확인할 수 있죠. 그러나 중력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그렇게 확인할 수 있나요? 없죠. 전자는 언제 생기기 시작했으며 누가 어떻게 전자에 그런 성질을 부여했나요? 과학으로 알 수 있나요? 알 수 없죠. 인간은 오성 즉 과학 할 수 있는 지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능 자체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요? 이러한 점들을 세계나 인간 영혼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을 감성으로 확인할 수 있나요? 없죠. 심지어 물자체라는 것도 인간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알려는, 학문적인 사고가 아니라 철학적인 사유를 했다면 이성을 사용한 것이죠. 이성을 잘못 사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을 '지적' 혹은 '정신적'과 분리해서 정의하면 영적인 것과 관련된 사고기능이 바로 이성인 것이죠. 지적인 것은 오성적인 것이고요. 일상적으로는 이를 통용하여 이성이라고 하지만 학문적 용어로써는 이와 같은 분명한 차이가 있죠.


지식에는 감성적, 오성적, 이성적의 세 가지 지식이 있고 뇌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감성적 지식뿐입니다. 주로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오성적 지식들은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학자들이 오랜 기간 연구하여 어렵게 겨우 알아낸 것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걸 전수받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성적인 것들 즉 영적인 것들은 애초에 그렇게 하기가 불가능하게 인간의 뇌가 설계되었습니다. 그 점은 창조주가 알려 줄 수밖에 없는 것들이죠.


갓 태어난 아기는 언어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가 나이가 들면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언어를 만들어 내고 그 언어를 다른 인간에게 알려 주어 그것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게, 그럴 가능성이 있게 뇌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알려주는 대로 그 언어를 습득하여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인간에게 날개나 아가미가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 영적인 진리를 알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철칙이죠.


창조주가 알려주는 것이 영적 진리이고 인간 이성의 용도는 오성처럼 어렵게 뭔가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식으로 하여 이해하고 적용하는 사고를 하는 것뿐입니다. 지식-이해-지혜의 원칙이죠. 아이는 처음에 엄마가 하라는 대로 언어를 배우죠. 사과를 사과라고 하면 그런 줄 알아야죠. 그런 식으로 먼저 영적 지식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이나 칼과 같은 어떤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면 왜 그런지 이해는 못해도 그것이 먼저 지식이 되게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해하는 순간이 오죠. 장성되면 그런 차원의 구체적인 간섭 없이도 상황에 적절하게 지식을 적용할 수 아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죠. 이성을 그 용도대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은 뚜렷한데 인간의 신체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음식을 씹어서 목으로 넘기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하죠. 그런데 위에서 그것을 섞는 과정을 인간이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위를 주물럭거려서 그렇게 하게 한다면 먹는 것이 얼마나 고역이겠습니까? 위운동이나 소화효소가 분비되게 하는 것은 창조주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죠.


인간은 모든 기능이 주어져 있고 그것이 운영되는 법칙에 순응하여 그렇게 해야 하죠. 이성을 잘못 사용한 결과 인간 세계는 멸망받아 합당한 끔찍한 곳이 되어 왔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경우에 따라 대량살상도 합당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죠.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것은 빼놓고 세상을 운영하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쌍방 사망지만 벌써 30만이 넘는다고 하죠. 전 세기(20세기)만 하더라도 인간이 한두 번 겪었던 것이 아니라 별 충격적인 일도 아니지요. 지금도 서로 으르렁거리는 나라들이 많죠. 멀리 볼 필요가 없습니다. 가까운 남북한도 그렇죠. 남쪽의 정파들 사이도 그러하죠.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는커녕인 것입니다.


이성적 영역, 영적인 영역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다 거짓이고 해로운 것들입니다. 모든 종교교리가 그렇고 ... 주의와 같은 이념적인 철학사상들이 다 그렇죠. 이러한 악한 세상과 삶에서 벗어나려면 이러한 지식의 이해와 그 적용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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