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 얼마나 되는지
어버이날이라는 것이 있죠. 어버이가 생명의 창조자는 아니지만 전달자이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양육에 대한 수고에 감사해야 한다고 추로 초등학교시절에 교사에게 배우고 그렇게 하도록 정해진 날이 어버이날이죠. 뭔가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주어진 근원을 인식하게 될 때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기본적인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 감사함을 기리는 노래들도 있죠.
"양이 얼마나 되나?" 하는 질문을, 그런 말들을 생의 어느 시점부터 인식하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양'에 대해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개념을 언제부터 알게 된 것입니까? 그 개념을 알게 된 순간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매우 초보적인 개념이기 때문이죠. '얼마나'와 '되다'도 그러합니다. 모두 범주 혹은 준범주에 해당되어 풀이도 안 되는 말들이죠. 그러나 언어와 관련된 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자신의 언어와 관련된 의식을 살펴볼 때가 있죠. 그리고 특히 전문용어 같은 것을 접하여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그때 그 어휘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었다면 언어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어휘에 대한 개념이 처음으로 자신의 의식에 들어온 때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개념들을 새롭게 알게 된 것에 대한 일지를 쓸 정도로 그렇게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될 수도 있죠.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까지 일상적인 어휘에 대해서는 인간의 언어와 관련된 의식의 속성상 그렇게 할 수 없죠.
언어를 대상으로 파악하는 고등의식이 형성되기 전에 언어기능이 습득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언어는 매우 중요한 선물과 같죠. 가치 있고 진기하기 그지없는 것이죠.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선물과 같죠 이 언어를 누리면서 그 근원에게 감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언어뿐 아니라 인간에게 행복의 소여가 되는 직접적인 것들은 많죠. 이 아름다운 자연이 제공되어 있는 지구,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등등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 자체이죠. 생명이 전달되고 양육되는 과정에 있어서의 신비스러움과 그것을 이루게 하는 본능적인 모성애 등
대부분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할 줄 모릅니다. 우연히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 근원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이죠.
올바른 인식에 기인한 진정한 감사는 인간이 정상적인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데 필수입니다. 효도는 기본적인 덕목이 되어왔죠.
이러한 인식이 없으면 어그러진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언어를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이죠. 그것으로 그릇된 사상을 만들어내고 거짓말을 하고 욕을 하는 것이죠. 전에는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하여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않았던 시대도 있었죠. 머리카락을 자르느니 차라리 목을 자르라고 하기도 했다고 하죠.
인간은 어느 시점까지 언어에 있어 전적으로 수종적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죠. 이 신기한 언어의식이라는 장치는 참 보배로는 것입니다. 언어를 구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면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죠.
머리카락조차 나름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임의로 자르는 것을 배은망덕이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윤리에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물론 그것 자체가 올바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식자체에 내포된 태도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언어가 만들어진 그 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찬 근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감사하고 그것이 주어진 뜻과 일치하게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