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거나 없거나이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이라는 표현이 있죠. 이 말은 "돈이라는 것이 있다면 1원이 있던 10원이 있던"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로 차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10만 원짜리 중고차이건 10억 원짜리 초호와 세단이건 말보다 편하고 빠르게 목적지로 갈 수 있는 기적과 같은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믿음이 있던지 없던지입니다. 믿음은 듣고 보고 경험한 것을 통해 생기죠. 오늘날 차라는 것이 있고 말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찾기 힘들 것입니다. 비행기에 대해서도 그렇죠. 그러나 천 년 전이라고 한다면 "뭐? 쇠붙이가 수백 명의 사람을 태우고 공중을 이동하여 한 나절만에 수천 킬로를 갈 수 있는 그런 기계가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겠죠. 쇠는 공기보가 무겁기 때문에 공중에 뜨는 것조차 불가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그런 것을 상상은 하였기에 권두운이나 하늘을 나는 담요 같은 것이 있었죠. 오늘날도 공간이동시켜 주는 기계 같은 것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심지어 비행접시 같은 것도 실제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죠.
믿음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옮기게 되죠. 자동차에 앉아 운전이라는 행위를 하거나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비행접시를 멈추어 타기 위해 특정 장소에서 기다리는 행위를 하는 사람은 없죠.
예수께서 말하는 믿음은 종교적 신앙이 아니라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 그런 절대적인 확신을 의미하죠. 예수께서는 그러한 참믿음이 매우 희귀하다고 생각하여 지금 시대를 염두에 두고 그런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표명한 적이 있습니다.
성서는 실제로 보면 어? 이런 것이 있었나 하고 사람들이 놀라게 되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기독교 교리와 상반되는 것이죠. 그중에서 몇 가지는 땅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이고 영혼이 죽는다는 것이고 죽음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이죠. 기독교교리는 사망지향적인 것이어서 사람이 반드시 죽어 불멸인 영혼이 지옥 간다거나 천당 간다는 것이죠. 그러니 영혼 자체가 죽는다든지 죽지 않고 땅에서 영원히 산다는 말을 성서에서 확인하면 놀라게 되죠. 하느님의 왕국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 말들은 비유나 상징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전혀 아니지요. 해석이 필요한 말들도 아닙니다.
아무튼 현대에는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들 자체가 자신의 교리도 실제 믿지 않습니다. 삶에서 추구하는 목표나 생활방식이 성서적이지 않기 때문이죠. 즉 거짓 교리에 대한 믿음도 실제는 없는 것이죠. 성서에서 곧 멸망되겠다고 하는 이 세상에 희망을 두고 현세적인 것,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죠. 기복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히려 기이하다고 생각하는 하느님의 왕국이나 지상의 낙원이 이루어질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와 일치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죠. 가지관이나 생활의 모든 면 그리고 성품이나 인격에서 그 점들이 확연히 반영되죠.
예수 당시에도 그분의 제자들은 그러하였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도 미래에 있을 낙원을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그 당시의 삶을 임시거주자나 외국인처럼 살았다고 하죠.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하죠. 영적인 눈이 있어 그러한 것을 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확신을 가지고 그에 따라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없는 사람들은 지금의 세상사람들처럼 사는 것이죠. 믿음이라는 것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서 이 세상 제도의 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정신을 눈멀게 하여, 하느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에 관한 영광스러운 좋은 소식의 빛이 비치지 못하게 해 왔습니다(고후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