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상학

초월하여 보는 눈

by 법칙전달자

초월하여 보는 눈


스웨덴의 저술가 군나르 아스펠린은 저서 「사조(思潮)와 신앙」(Tankelinjer och trosformer)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 점은, 자연이 나비나 모기에게보다 인간에게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 우주와 우리의 내부 세계에서 상호 작용하는 그러한 자연의 힘 앞에서 우리는 무력한, 완전히 무력한 존재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진보에 믿음을 두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어 온 세기의 말엽에 문학에서 매우 자주 등장한 인생관이다.”


미국의 교직자 존 S. 스퐁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견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절대적 진리에는 아무도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 특히 공인된 학자인 경우 그 주장의 그럴듯함이 더 강할 것입니다. 그러니 강의도 하고 책도 내는 것이고 그를 따르거나 그 주장에 공감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겠죠.


위의 두 경우 부정적인 사상을 전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점들을 강하게 마치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다음은 윗글들에 대한 중립적인 평가의 글이죠.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인류가 절대적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발전시켜 왔다. 당신은 철학이 “존재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학문”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철학이 그 정도까지 설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웨덴의 저술가 알프 알베르그는 「철학사」(Filosofins Historia)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많은 철학적 문제들은 그 성격상 확답을 하기가 불가능하다. ·⁠·⁠· 많은 사람들은 [사물의 근본 원리와 관련된]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가 이 ·⁠·⁠· 부류에 속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철학을 통해 생명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 온 사람들은 흔히 불만족이나 번민에 빠지고 만다.


인간은 철학의 가치나 성격을 파악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 위와 같이 비평적 평가를 할 수가 있죠.

물론 부정적인 사상의 주장은 긍정법칙을 거스려 진리일 수 없습니다. 이 명제 자체도 부정적이긴 한데 부정의 부정이므로 본질상 긍정적이어서 그러한 자가당착은 없는 것입니다. 긍정법칙이란 표현상이 아니라 본질상 부정적인 사상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니까요.


저의 이러한 진술이 저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위의 학자들의 생각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창조주의 시각으로 초월적으로 보려면 인간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 깊은 사람이라면, 관련된 몇 가지 질문들을 고려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진리에 도달할 수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예수의 사도 중 하나가 하느님의 뜻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진리”라는 단어가 믿음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00회 이상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리에 도달할 수가 없다면, 진리라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언급된 이유가 무엇일까요?—요한 8:32; 디모데 첫째 2:3, 4.


인간이 뭐든지 의심하려하고 중독성이 강한 그 부정적인, 하지만 스스로 모순된 자가당착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하느님의 눈으로, 초월적인 시각으로, 정확하게 인간들이 고안한 사상들의 거짓된 본질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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