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사과'라고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 부모가 사과를 보여주면서 단지 '사과, 사과'하면서 사과가 '사과'임을 가르칩니다. 미국이라면 'apple'이 되죠. 왜 그러한지 이유에 대한 설명 전혀 없이 직접 보면서 그렇게 배우죠. 의식에 개념들이 그렇게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과가 책상 위에 있다."는 말을 배울 때도 그러합니다. 글은 나중에 배우게 되는데 이 때도 무조건 따라 쓰게 하죠. 문법적 설명도 전혀 없습니다. '사과', '책상' 뿐 아니라. '있다' '위' '가' '에'에 대해서도 그 본질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죠. 본질적 분석적 설명 없이 그냥 반복적으로 쓰고 읽게 하죠.
다른 방법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명들은 빨라야 7세경, 보통은 10세가 넘어야 가능합니다. 절대다수의 아이들은 이때 함께 그런 방식으로 배워야 할 절대가치들을 배우지 않죠. 창조주의 이름이나 그분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요. 심지어 기독교 가정에서도요. 도덕적인 논리적인 혹은 영적인 기초를 배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우지 않는 것은 할 줄 모릅니다. 대신 욕이나 총 쏘는 것 같은 것을 배우죠. 무기 장난감을 일찍부터 가지고 놀죠. 욕이나 파괴적 게임은 문화화 되죠. 본질적이고 분석적으로 추리하고 비평적이고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나중에 배우게 됩니다. 또한 의심하는 법을 배우게 돠죠. 소위 철학이라는 것을 통해서요.
그런데 사과를 예를 들었으니 사과를 두고 생각한다면 사과를 한국에서만 '사과'라고 하죠. 언어가 6,000 종이므로 수천 가지로 다르게 부르겠죠. 사과를 '사과'라고 하는 것은 정말 사과가 가진 특성에 적합하게 이름 붙인 것입니까? '사과'가 사과에 대한 가장 적합한 명칭이라면 다른 모든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죠. 그러나 언어는 자의적이라는 원칙에 따르면 이런 시각은 의미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서에 창조주가 아담에게 동물의 이름을 지으라고 했을 때 아무렇게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물의 특징에 맞는 의미나 발음을 가진 단어들로 그렇게 하려고 했겠죠. 의성어인 경우 동물의 울음소리도 나라마다 다르긴 해도 인간의 웃음소리에 대해서 '하하'라고 하는 것은 공통적이라고 하죠. 엄마에 대해서는 그 칭호에 대해서 m발음이, 아버지에 대해서는 p발음이 많이 사용된다고 하죠.
아무튼 통일성이 없는 이런 면에 대해 의심하여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의미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학자들은 대개 매우 자질구레하다고 생각되는 그런 면에 대해서도 꼼꼼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하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처음에 전적으로 직관에 의하여 터득하여 형성된 그 기초개념들에 대해 의심을 품는 무익 하거나 해로운 사고를 인간이 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책상 위에 있는 저 사과가 과연 전정으로 있는 것인가? 와 같은 방식이죠. 소위 그런 사고에서 각종 존재론에 해당하는 이론들이 나오는 것이죠. 실제론, 유명론, 유아론 등등요.
고전 사회에서는 여러 전통적인 규범들도 그렇게 배우죠. 여자는 피부를 노출하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 새롱거리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 등등 여러 도덕적인 규범들도 이유에 대한 설명 없이 배우게 되죠. 전통적인 관습이나 문화 같은 것은 지역마다 다 다르지만 지역적으로 소위 과학적인 타당성 있는 설명 없이, 사과를 '사과'라고 배우듯이 일방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전수되어 왔죠.
그런 모든 방식들이 물밀듯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1914년이라고 합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난 역사적인 해이죠. 소위 14,15세기의 문에 부흥시대에도 전통에 대한 그와 같은 파괴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과를 '사과'라고 배우는 것과 달리 행동지침에 해당하는 문화적인 것은 미신적이고 비합리적인 것들도 많았으므로 혁신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남존여비 사상을 고수해 왔던 한국에서도 여성이 정치인이나 법조인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통령이 된다 헤도 그것 때문에 반발을 사는 그런 일이 없이 그처럼 합리화되었다고 할 수 있죠. 물론 아직도 여성에 대한 편견이 고수되고 있는 이슬람지역도 있긴 하지만요.
흑인에 대한 편견, 인종차별이 심했던 미국에서도 흑인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하죠.
그런데 언어가 자의적인 것은 꼭 해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것은 처음부터 해로운 것입니다. 각 지역마다 자의적인 그런 것들이 오늘날 엄청나게 변했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것은 변증법적인 논리에 따라서 처음에 거짓이 있었는데 그에 반하는 다른 거짓이 생겨 충돌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거짓이 생기게 되었을 뿐이죠.
태어나서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기존의 것을 의심하는 그런 사고를 배웠고 그리하여 그것을 비평하고 새로운 것을 고안하는 사고를 하는 것이지만 양상은 결국 그러한 것이 되는 것이죠. 그것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여 세상은 이전 어느 때보다 다양한 거짓과 악들로 혼란스럽게 분열되어 있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세상의 본성이 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하고 보고도 믿지 않으려고 하죠.
자신이 보고 싶은 방식대로 비평적으로 보고 같은 시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단합하여 이기적인 외침을 외치죠.
예수가 세상에 온 것은 만물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에베소서 1:10)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러한 것이죠. 그 하나의 표준에 순응하여 자신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요. (데후 1:8,9,10) 사람의 선택은 단지 그것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일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