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심의 유익
논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쟁이 관련된 만큼 순수하게 지적인 것이 결코 될 수없죠. 자존심 같은 비지성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결코 유익한 결과가 도출되지 않죠. 그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혹은 온전히 이상적인 마음상태로 진위만을 판단하는 것인 경우 논쟁의 상황으로 진행되지도 않습니다. 대개 논쟁의 결과는 적대감만 강화되고 극단적으로는 하늘아래서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다가 되기도 하죠.
종교적으로도 교리 논쟁이 있을 때 결과는 힘이 센 쪽에서 상대를 이단으로 단정하고 말살하려 한 적이 많았죠. 인간이 그만큼 완악한 것이죠.
기독교에서 교리적인 문제로 논쟁할 때 성서의 기록을 최종결론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그런 말씀에 대한 존중심이 없을 경우 그 논쟁의 더욱더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그걸 보고도 이건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그것도 또 의미를 변경시키면서 다르게 해석하려 하면 성서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해석하려면 성서를 볼 필요가 없죠. "하느님은 오직 하나이다", "영혼은 죽는다", "땅에서 영원히 산다"와 같은 말은 해석이 필요한 그런 성격의 말이 아닙니다. 그러한 직접적인 언명을 최종결론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성서를 볼 필요가 없죠. 사실 주로 천주교에서는 성서를 공식적으로 무시하기도 합니다. 성서가 뭐냐 그런 책은 나도 쓸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교리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개념에 있어서도 말씀을 최종 권위로 인정하는 그런 말씀에 대한 존중심이 있는 경우 엄청난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배가 신이다, (빌립보 3:19) 탐욕은 우상숭배이다(골 3:5)와 같은 개념이 나오죠. 모든 인간은 뭔가 신으로 여긴다는 개념을 전달하고 있죠. 어떤 사람이 나는 무교이다 혹은 무신론자라고 해도 사실은 뭔가를 숭배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죠.
전후 문맥을 보면 성과 관련하여 탐하는 자들은 배를 신으로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술 취하는 것과 같이 환각성 있고 중독성 있는 것, 담배나 마약 같은 것이 해당되죠. 마약이나 담배에 적용될 수 있는 그리스 어원인 파르마키아는 성서에 직접 사용되죠. 생활에서 육체의 쾌락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배를 숭배하는 사람으로 묘사했죠.
돈이 있어 그런 것을 마음껏 탐하는 사람은 자신이 능력이 있어 그러한 것으로 자랑하기까지 하는데 성서에서 수치를 영광으로 여긴다는 말과 같죠.
인간은 어치피 자기가 모르는 것에 따라 주로 살아갑니다. 사용하는 기기들도 그 원리들을 모르고 대부분 사용하는 갓과 같이 영적인 기능들도 그렇죠. 숭배와 관련된 기능을 쾌락에 대해서 사용한다고 성서가 규정하면 그런 것이죠. 사람들은 배를 숭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창조주 대신요.
이 글은 쾌락에 대해 부정적으로 규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신처럼 추구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고통스럽게 되고 절망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서만 그러한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지요. 요즘은 술병이나 담뱃갑에 경고의 문구들도 있고 마약과 음란물은 공식적으로 엄금하고 있죠. 공인들도 성매매나 성추행과 같은 부도덕한 성적 쾌락을 추구했음이 드러나면 사회에서 매장될 정도 불명예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자실 하는 경우도 있죠.
꼭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뿐 아니라 삶과 관련된 개념들에 대한 진리를 얻으려면 유일한 방법은 성서에서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찾는다면 그것을 또 해석하려 할 것이 아니라 최종결론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면 성서를 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