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양식
사람들은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소유하려고 하죠. 소유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원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질병이나 노쇠, 죽음이 인간에게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요.
대부분의 고대언어에는 have에 해당되는 단어 자체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는 마음에 소유양식(having mode)이라는 것이 없었음을 알려주죠. 한국어에도 그런 점들이 있습니다. "너 얼마의 돈을 가지고 있어?"라고 하기보다 "너 돈 얼마 있어?", "너 형제들을 몇을 가지고 있어?"라고 하지 않고 "형제가 몇이냐?" 하고 묻는 것이죠. 영어로는 have로 표현된 것을 '있다', '이다'의 존재양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소유의 대상은 분리된 이질적인 것입니다.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을 때 그 자동차는 몸밖에 있는 이질적인 것이죠. 그런데 심지어는 만물을 일체라고 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죠. 인간이 행복하려면 일체의식 즉 하나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분리의식은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에서도 만물은 원래 하나로 얽혀있다고 하는 것이죠.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 실제 필요한 것은 인간과 일체인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요. 인간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소유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존재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을 소유하고 계신다고 하지 않고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죠.
뭔가 소유하고 있는 것과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한 사람이 좋지 않은 일을 당해서 그의 친구에게 찾아와 "내가 마음이 처량하니 내게 따뜻함을 나타내줘"라고 했을 때, "그래? 그거 몇 개 있으면 되겠어? 한 천 개면 되겠어? 잠깐 기다려! 집에 만 개 있는데 금방 가지고 올게"와 같이 되는 것이죠.
소유물은 베풀면 줄어들죠. 100만 원이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50만 원을 주었다면 50원만 남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누군가에게 100의 친절을 베풀 경우 그 사람에게 그 친절이 조금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 즉각적으로 계속 베풀 수 있는 것이죠.
인간이 실제 삶과 행복에 필요한 것은 원래 소유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심지어 물질적인 것도 그러해서 생활에 땅이 필수적인 것이라면 그 땅을 외부의 이질적인 것으로 의식하지 않고 존재의 일부로 인식하여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죠. 즉 손이 자신에게 속해있는 것처럼 그 땅은 나에게 속해있다(be to)와 같이 표현한 것이죠. 가족관계도 소유의 대상은 아니죠. 사회적 관계는 삶의 필수이죠. "너 어머니 계시냐?"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너 형제 몇을 가지고 있냐?"라고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죠. being mode 즉 존재양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 본질상 필요 없는 것은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러한 것을 소유하려 하기 때문에 인간이 고통을 겪고 파멸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것이 돈과 다른 사람에 대한 통제권인 권력입니다. 권력이란 누군가에게 일부건 전부건 넘겨주면 자신에게는 그만큼 없어지는 것이죠. 법적으로 그것이 규정되어 있기도 하죠. 인간은 권력으로 존재해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소유물이 되는 것이죠, 돈도 그러하죠. 원래 없어야 하는 것이죠.
전 글에서 '그들의 영혼은 폭력'이라고 한 존재양식적인 표현을 볼 수 있죠. 그것은 외부의 이질적인 것처럼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한 속성처럼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어떤 사람이 무한한 권력을 갖고자 하는 권력의 화신처럼 된다면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죠. 돈 밝힘에서 벗어날 수 없이 그런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저 사람은 돈 귀신이야."처럼 존재양식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죠.
필요이상의 것에 대한 추구를 욕망이라고 하고 과도한 것을 탐욕이라고 하면 그 모든 것은 소유의 대상인 것이죠. 실제 소유하는 것은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라 성서에서는 이를 쓰레기 혹은 배설물로 표현합니다. 돈은 일시적으로 필요하죠. 그러나 필요한 정도의 돈은 그에 대한 소유욕을 갖지 않아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시적으로 존재의 일부처럼 그런 관계인 것이고 욕심을 내야 하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지요. 예수도 돈이 필요했죠. 그러나 그는 그것에 조금도 욕심을 내지도 않았고 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의 활동에 필수적인 일부로서 존재양식적으로 의식했던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비유법 차원에서 존재양식적 표현을 쓴 것은 아닙니다. 즉 예수는 평화이다. 나는 진리이다. 와 같은 표현은 은유법이 아니라는 것이죠. 성서에는 심지어 부조리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런 표현들이 많습니다. 일부는 은유법에 해당되지만 대부분은 직설법이라 소유양식에 젖은 현대인들이 보기에 그런 식으로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죠.
결론은 인간의 삶과 행복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특성으로서 혹은 존재의 일부로서 존재양식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소유물처럼 외부의 이질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자동차이든지요. 소유욕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자연적인 것 즉 꽃이나 나무, 산이나 바다는 일체인 것으로 의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특히 동료인간에 대해서는요. 소유하려고 꽃을 꺾어서 가지려 하거나 동물을 잡아서 가두려 하는 것은 그것을 망치는 것이죠. 특별히 돌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소유하기 위해서라면요. 많이 가지려 하고 그와 관련된 수치를 크게 하고 전시하려 하는 정신 이는 바로 파멸적인 의식인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통제권을 공식적으로 소유하는 그런 권력을 지닌 정부와 국가들이 영원히 소멸되게 되는 이유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