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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Oct 23. 2023

사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사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한국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유치원 초등, 중등, 고등학교 과정을 거치고 가능하면 S대에 가려하죠. 그걸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만 그것은 상대경쟁적인 것이며 또 비율적인 것이죠. 원천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데 그런 제도에 익숙해져 자기를 망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표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좌절감이나 패배감을 느끼죠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면 뿌듯함을 느낄지 모릅니다.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으로 느껴 부모들은 그걸 위해 기도하고 불공드리고 하는 식으로 지극 정성을 들이는 경우가 있죠. 


사실 어떻게 보면 공교육 제도 자체가 지극히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사실 지식이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죠. 음식이 몸에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인간의 정신에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음식과 관련해서는 인간은 어느 정도 정상적입니다. 뭄에서 자발적인 필요를 느끼죠. 그래서 능동적으로 추구하죠. "엄마! 나 밥 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섭취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것이 생활화되어 있죠. 심지어 먹기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신체적 음식과 관련해서는 살아 있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뱃속의 아기는 그렇지 않죠. 외부에서 강제로 영양물질이 공급되는 것이고 본인이 자발적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죠. 태어나서 몸이 병에 걸리면 약을 먹어야 하죠. 그런데 그것은 자발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득이한 것이어서 의무적으로 그렇게 하죠. 대부분의 약은 맛있는 것도 아니라서 당으로 발라져 있거나 그냥 꿀꺽 삼키도록 되어 있죠. 안 먹게 되었으면 좋은 것이죠. 


인간이 정신적으로 태어나 있다면 즉 살아 있다면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지식을 자발적으로 즐거움으로 섭취했을 것입니다. 지식 섭취는 생활화되었겠죠.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도 그렇지 못했고 자녀에게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공부라는 것은 재미는 없어도 필요에 의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죠. 잘하지 못하면 벌을 주는 식으로 강제하는 것입니다. 


공부에 대한 동기는 의무적이고 태도는 형식적이고 수동적이죠. 방법은 지극히 비효율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맛있는 지식을 아이들은 약을 먹듯이 꿀꺽 삼키듯이 하죠. 그러니 즐거움도 모르고 소화도 잘 못 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꿀꺽 삼키면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즐겁지도 못하고 소화도 잘 못 시키는 것이죠. 


아이들은 지식에 대한 잠재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죠. 10분이면 즐겁게 이해하면서 관련 문제들을 척척 풀게 되어 100점 맞을 수 있게 될 것을 10시간 고역스럽게 공부하고도 80점 맞기 힘들어하는 것이죠. 엄청난 모순이지만 너도 나도 그러하니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죠. 갈매기 조나단이라는 소설이 생각나는데 왜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있는데 애써 빰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뛰고 있는 것입니까? 날개 사용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죠. 


그렇게 되지 못하여 학교 다니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해야죠. 원래는 자발적으로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공부를 왜 외부에서 강제하고 확일적으로 6,3,3년과 같이 기간을 정해놓고 과목이나 진도나 시험시간 같은 것을 정해놓는 것입니까? 자발적으로 잘 알아서 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죠. 대학에 가게 된다면 정해진 시간이나 장소에서 강의를 들어야 되고 또 대개 기간은 4년이 되죠. 자신이 원해서 자신이 필요해서 하는 공부를 왜 그런 식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요? 참진리를 얻고자 하는 뜻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그냥 출세하는 데 유리하다고 하니까 간판이 필요해서 그런 비합리한 과정을 밟는 것입니까? 


특정대학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갖는다거나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지독한 무지에 의한 것으로 심히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을 나온 사람들이 사회를 주도하죠. 그러니 인간이 또한 세상이 이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나 사회는 정상적이 아니지요. 어떤 누구를 삶의 본으로 내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 서로 어그러져 있고 기형적인 모습인데 서로가 그러하니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이죠. 


전도서 1장 15절입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이지러진 것 즉 비정상적이고 결여된 것, 잘못된 것들은 셀 수 없이 많죠.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바로잡기가 불가능한 세상에서 현재 인간들은 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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