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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Nov 14. 2023

리비도, 왜 그걸 욕으로

리비도, 왜 그걸 욕으로 


입술은 바짝 타들어가고 진땀이 흐르는 떨리는 손길로 팔의 드러난 맨살을 부드럽기 그지없이 더듬는 정도로도 또 여성은 그런 손길에 꼼작 없이 이미 마비된 팔을 내맡기면서 눈을 감고 표정은 오르가즘으로 일그러져 있고 애액은 이미 흠뻑 분비되어 있는 그런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이 있나요? 서로 미혼인 사이에서 특별한 환경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이라고 생각되나요? 또 환경이 폐쇄되어 있고 안락함이 갖추어져 있다면 다음 진행이 어떻게 될까요? 핵심적인 장면만 묘사해 본다면 결국은 팬티를 내리고 그 은밀한 부위를 면밀히 감상하면서 나름의 모종의 여러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상당시간 비명을 지르는 시간이 있고 폭풍우는 지나가겠죠. 서로는 땀에 흠뻑 젖어 있겠지만 이는 연애시절이나 신혼 초가 아니라 결혼한 지 수백 년, 수천 년 지난 부부관계의 한 단면이며 기본적인 정도이죠. 인간의 성에 대한 상상력이나 창의력도 무궁무진해서 날로 양적으로 질적으로 그 쾌락의 도를 더해가도록 연출할 수 있게 원래 그렇게 되어있죠. 그러함의 발견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고도로 순화된 일부일처제 운동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녀의 성기는 첫 인간 부부의 범죄 후 치부가 되어 가장 보안을 철저히 하는 곳이 되었죠. 징그럽고 추하게 느껴지게 되는 면이 있지만 성적 쾌락이 집중된 것이기도 하죠. 


사람들이 결혼 전에는 이성을 자신의 성욕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가 하는 눈길로 탐색한다고 하죠. 10대 후반에는 뇌의 60%까지 성호르몬이 지배한다고 하고요. 


이 성적인 행복이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데 외모가 훌륭해야 그 행복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다고 하여 외모지상주의가 된 것은 그런 면의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희고 매끄러운 우윳빛 피부를 선호한다거나 s자 몸매에 홀리는 요염한 각선미 등등. 남성 성기와 관련하여도 많은 손지검을 하죠. 


이 점을 부인하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적 행복에 있어서 나중 요건이며 관련된 최상의 이상적 외모는 다른 것이 갖추어졌을 때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성적 행복에 대해 불구가 되다시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하고 신성한 것인데 그런 의식이 없다는 것이죠. 욕의 대부분이 성과 성기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죠. 인간들이 그것을 스스로 천하고 모욕적으로 다루는 것이죠. 


네 저수조에서 물을 마시고, 네 우물에서 흐르는 물을 마셔라. 너의 샘이 바깥으로, 너의 물줄기가 광장으로 흘러가서야 되겠느냐?  그것이 너만을 위한 것이 되고, 네 곁에 있는 낯선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지 않게 하여라. 너의 샘이 축복을 받게 하고, 젊어서 얻은 아내와 함께 기뻐하여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우아한 산염소이니, 언제나 그의 젖가슴으로 만족하고 늘 그의 사랑에 매료되어라. 그러므로 내 아들아, 무엇 때문에 방탕한 여자에게 매료되고 부도덕한 여자의 가슴을 끌어안아야 하겠느냐? 사람의 길이 여호와의 눈앞에 있으니, 그분은 그의 모든 길을 살피신다. (잠언 5장 15~21)


창조주가 인간의 성적 행복을 염두에 들 때 그것은 배우자에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성적 행복은 그 사이에서 누리도록 되어 있죠. 여기서 물이나 샘은 성적 흥분으로 여인에게서 흘러나오는 애액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그의 남편의 사랑으로 24시간 내내 흐른다 해도 과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또 샘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죠. 성적 건강함과 매력이 항상 풍성하게 넘쳐흐르는 것을 의미할 수 있죠.


반면에 창조주의 도덕률은 혼전 혼외의 모든 성관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사례들을 몇 가지 살펴보면 다윗의 아들 암논은 그이 이복누이 다말에게 욕정을 품었다가 겁간을 하였는데 그것으로 기대했던 쾌락을 전혀 얻지 못했는지 그녀를 미워하여 쫓아버렸는데 나중에 그의 친오빠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죠. 비슷한 일은 야곱의 딸 디나에게도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그의 친오빠들이 강간한 남자가 속한 도시의 남자들을 다 죽였다고 되어 있죠. 다윗의 밧세바와의 간음과 그로 인한 징벌은 유명하죠. 이집트의 군대대장 보디발의 아내는 노예로 있던 요셉에게 관계를 하지고 졸라댔던 것으로 유명하죠. 


극단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성에 미친 탕녀들에 비유하고 있는데 그녀들은 주변이방국가들의 귀족 남자들이 성기가 크고 정액을 오랫동안 발사하는 그런 정력이 왕성한 남자들이어서 화대를 주고 쫓아다니면서 장소 물문하고 간음을 행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죠. 물론 율법에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이죠. 


사도바울도 남편을 일찍 사별한 젊은 과부들이 정욕에 견디지 못하겠거든 결혼하라고 권하고 있죠. 


한편 예수나 니중에 사도가 된 그분의 제자들은 이런 면에서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욕구가 혹 있었다고 해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젊은 디모데에게도 젊은 여자들을 일절  순결하게 친누이처럼 대하라고 했죠. 그들이 사도로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는 60대 정도였고 상당수는 기혼이었죠. 사도 바울처럼 미혼인 경우에도 그는 성으로부터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 그 점에 대해 교훈을 베풀 수 있었죠. 


특히 예수는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였고 젊은 여신도들도 주변에 많았죠.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까지도 그런 면으로는 일말의 의심의 눈으로도 보지 못할 정도로 그 점에 있어 전적으로 순수하게 영적으로 대했죠. 룻인 경우 보아스에게 접근하여 자신을 성적으로 취하라고 요구하였지만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둘은 높은 의식주준을 가지고 있었고 순수하게 영적인 방식으로 대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은 배우자가 아닌 이성에게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산체적으로 일절 성적인 관심이나 접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성적으로 불행해지기 때문이죠. 원리적인 얘기를 하지면 인간의 무의식에는 창조주를 섬기는 것은 뭔가 자유나 행복을 제한받는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쉽게 이방신을 숭배하도록 유혹을 받은 것도 그 숭배에는 성전 매춘부가 있을 정도로 그리고 신도 간에도 공공연히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마음껏 성적 욕구를 발산하여 그 쾌락을 만끽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미 성적으로 해방되었다고 하고 처녀 총각인 상태로 결혼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고 하죠. 그러나 세상이 성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죠. 도착적이고 변태적이고 부도덕하고 불법적으로 추구하려 하지만 그렇지 않죠. 진정한 성적 행복은 그것을 거룩하고 존귀하게 여길 때 그리고 마음으로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여 늘 옆에 두고 보고 있어도 보기에도 아깝고 늘 설레고 그리울 정도로 그렇게 소중하고 존귀하게 느낄 때 살짝의 터치만으로도 기절할 정도의 강한 쾌락을 느끼는 것입니다. 창조주께 너무나 감사하다고 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쾌감은 부부간에 국한되어 나날이 발전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진정한 성적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원래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면 다른 이성에게는 조금이라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끼도록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죠. 등려군의   我只在乎你라는 노래의 기사를 보면 그런 상황이 연상되는 대목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도 어렵지 않게 가정할 수 있는 상황이죠. 


사람들은 창조주에 대해서 모독을 돌려왔듯이 그렇게 성에 대해서도 해왔습니다. 또 제대로 쾌락을 누리지 못해서인지 그것으로 욕을 만들었죠. 


잠언의 인용된 구절에서처럼  "사람의 길이 여호와의 눈앞에 있으니, 그분은 그의 모든 길을 살피신다." 그분은 성과 관련하여 그분이 세우신 도덕적 기준에 순종하지 않는 인간들을 그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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