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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Nov 16. 2023

부질없다

부질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젊었을 때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여 사회의 중견인물이 되고 부와 명예를 얻게 된 사람들을 인정해 주고 '명사'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년에 요양병원에 누워 그의 생명줄을 의사에게 맡기고 유언을 남겨야 될 즈음에 그가 젊음을 희생해서 번 돈이 더 이상 자산이 아니라 유산으로 성격이 바뀌었음을 알 때 그리고 자신이 젊었을 때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보고 싶은 곳에 여행을 다니면서 인생을 제대로 즐겼는지 회상하면서 부질없다고 한탄할 때 그의 그러한 처한 상황 때문에 그의 삶은 정말 부질없는 것이 된 것입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나는 더 이상 삶의 여한이 없도록 만족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면서 흐뭇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병석에 누워 그 잠깐 지나간 몇 십 년의 과거를 그렇게 회상하는 경우에는 부질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다 부질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포부와 야심을 가진 상대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죽어 가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에 큰 분함을 느끼며 한이 되어 죽어서도 그 혼령이 나타나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은 장면을 등장시키는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것들이 있죠. 삼국지의 관우인 경우는 아직도 그를 기리는 사당이 있을 정도로 신격화되어 있기도 하죠. 그는 목베임을 당해 죽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자만 실상은 그가 그렇게 죽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한 경우가 훨씬 많다고 하죠. 영계에서 어떤 신이 관우에게 이점을 일깨워주자 그는 깨닫고 그 분한에서 벗어나 평화로이 저승에 갔다는 그런 묘사도 있죠. 


아직 멸성의 인간들, 죽을 인간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동상을 세워 기리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도 있고 악명 높은 인사들도 있죠. 그들이 어떻게든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에 부질없는 삶을 살았다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이나 인간 개개인이 느낌이 그러한가 보다는 절대적 관점에서 즉 창조주의 관점에서 인간의 살아있을 때의 잠깐의 치열한 추구는 헛되고 부질없는 것입니다. (전1:2,3)


지금은 과거에 비해 현란한 문명의 이기 가운데 예전의 황제들도 누리지 못하는 편의를 보통 사람들이 누리면서 살죠. 그러한 면으로 공이 있는 사람들은 부질없는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그런 점들에 관한 인간의 부질없는(?) 개인적 생각들을 피력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결론은 실제로 인간이 죽어 없어진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100년, 1000년이 아니라 100억 년, 1,000억 년을 살아왔다 해도 죽어 없어진다면 그동안의 삶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와 같은 부질없다는 생각과 그런 감정을 갖는 것도 살아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의식이 소멸되며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것입니다. (전 9:4,5,10)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큰 거짓말이 있죠. 하나는 현생명이 인생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유물론이나 진화론 같은 무신적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죠. 그들은 인간을 짐승과 본질 상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짐승들 세계에서 늘상 일어나는 것처럼 필요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지금도 국가 차원에서 그렇게 하고 있죠.  


또 하나의 거짓말은 인간에게 영혼이라는, 몸을 떠나는 의식체가 있어 천당이나 지옥, 연옥에 가거나 윤회된다는 것이죠. 심지어 그 영혼이 영원 전부터 있었고 무한히 윤회되어 다른 생명체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죠. 본질상 한 통속의 거짓말입니다. 보통 과학자나 일부 철학자는 전자의 생각을, 종교인들은 후자의 거짓말을 주장하죠. 그런 것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법칙으로 확립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와 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죠. 


그것을 정확히 아는 존재가 있다면 창주주뿐이죠. 그분은 성서를 통해 간명하게 삶과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인간은 영생의 전망이 있지만 불손종하면 죽게 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지은 죄를 예수가 대속하였으므로 이를 믿고 창조의 법에 순응을 하면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그 소식을 접하지 못해 죽었던 사람들은 부활되어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고요. 하느님이 세우신 예수가 왕인 왕국의 천년통치를 통해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좋은 소식이죠. 


성서에서는 이 좋은 소식을 씨에 비유합니다. 좋은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씨가 뿌려지는 것에 비유하죠. 바로 거부하는 경우 길가에, 일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압력에 굴복하여 결국 포기하는 사람은 돌밭에, 돈 버는 것과 쾌락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인 경우 가시덤불에 뿌려지는 것에 비유되죠.(누가 8:9~15) 

사람은 살아야 사람이고 생사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여러분에게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여러분 앞에 둡니다. 당신과 당신의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하여 당신의 하느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에게 고착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생명이십니다.(신명기 30:19,20)


왜 살 수 있는데 그 부질없는, 그 죽게 되는 삶을 그렇게 고집스럽게 선택하려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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