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광고
극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한 달에 만원 단위를 기부하면 그들이 그러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공익성으로 보이는 광고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걸인은 거의 볼 수 없지만 노숙자들은 볼 수 있죠.
보통 사람들에게 충동적인 동정심이 생기게 하는 상황은 영상으로나 실제로나 자주 접하게 됩니다. 또 기부나 자선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죠.
한 집안에서 사는 가족인 경우 부를 공유하기 때문에 누나는 부유한데 나는 가난하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죠.
물론 가난에 대한 책임을 그 자신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 게으름이나 도박 같은 나쁜 습관이 그 원인일 수 있죠. 사기를 당했거나 재난이나 대수술 같은 것으로 재산상의 큰 손실이 있었을 수 있고 애초에 가난하게 태어나고 부를 쌓을 기회가 없었을 수 있죠.
근본적인 원인은 세상을 지배하는 거짓 사상이죠. 여러 복합적인 거짓 사상들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배타적인 우리의식, 자기본위주의, 개인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에 깊숙이 젖어들게 되었죠.
동료인간이 한 몸에 속한 지제라는 의식, 하나의식이 없는 것이죠. 이는 가족의식보다 더 밀접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영으로 하나의 지체저럼 밀접하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본연의 상태입니다. (엡 4:4, 롬 12:5, 고전 12:27) 양자역학에서도 만물은 본시 하나로 얽혀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손가락 끝이라도 조금 찔려 피가 흐른다면 누구든지 그걸 그냥 두지 않고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감싸는 등의 조처를 취해 상태가 바로 아물도록 하죠. 한 몸의 지체들은 전혀 이질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귀는 부유한데 발가락은 가난하다는 상황은 있을 수 없죠. 어디 한 군데라도 문제가 생기면 몸전체가 그런 것 같이 되죠. 그 자신이 아픈 것입니다. 한 군데라도 아프면요.
동료인간이 가난이나 질병 등으로 고난을 당한다면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다른 일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죠. 신체의 한 부위가 아픈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누군가가 가난하면 있지 말아야 할 가난이 우주가운데 있는 것이고 누군가가 아파도 그러하죠. 자신이 아픈 것입니다.
원리상 인간에게 가난이라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죠. 그런데 세상의 배후 통제자의 정책상 가난을 인위적으로 방치하거나 조장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지구의 전체 자산은 지금의 두 배의 인구라도 아무도 가난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하죠.
충동적으로 부추겨지는 동정심에 따라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코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한 가난은 동료인간을 분리된 남이라는 인식에 기인하기도 하기 때문에 물질적인 기부나 선행이 결코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람을 느끼기 위해, 기분을 좋게 하거나 안심하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기 위해 등등 인간 본연의 의식에서 벗어난 동기로 선행이라는 것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그 자신의 의식주준이나 영적 상태를 개선시켜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양쪽 모두에게 진정한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식의 우선순위에 따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