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인간에게는 앎의 욕구가 있고 기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앎의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이 논리적이죠. '논리'의 어원은 로고스인데 이는 다른 여러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진리, 원리, 언어 등등의 의미도 있죠. 예수를 로고스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이를 말씀이라고 번역하죠. 일종의 용어로서 그렇게 사용하는 것인데 창조주의 수석대변인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분 자신이 진리라는 의미이기도 하죠. 그분 자신이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고 하기도 했죠.
인간의 앎이란 당연히 진리에 대한 앎을 의미하죠.
지금의 인간들은 어찌 보면 앎을 포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문화는 기원전 4~6세기가 피크였다고 하고 그 뒤로는 하강곡선을 긋는다고 하니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그런 면에서 열악한 상황이라 할 수 있죠.
그 시기에는 그리스의 유명철학자, 석가모니 그리고 중국의 제가 백가들이 있었죠. 현재의 인간들은 아직도 앎을 그들의 가르침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죠. 사서삼경이나 도덕경, 불경 등의 연구에서 어떤 교훈들을 얻으려고 하고 있죠. 그나마 앎을 추구하는 일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죠. 기독교 교리도 플라톤 철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소위 신학도 그 시대 사상가들의 사상들을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런 사상들이 담겨 있는 책들을 고전이라고 하고 예지(叡智 영속적 가치가 있는 지혜)의 책들이라고 하여 필독을 권하기도 하죠.
그때의 사상들과 그 뒤의 사상들은 과연 앎, 로고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란 온전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이 말씀과 일치하면 중복, 불필요한 것이고 일치하지 않으면 틀린 것일 뿐이죠. 또 서로 상충하는 생각들이 모두 옳을 수는 없습니다. 그 사상체계의 99.9%가 옳다 하더라도 틀린 0.1%는 전체를 거짓과 다름없는 것으로 만들죠.
그 당시의 사상들이 단편적으로는 일리가 있고 매우 소중한 교훈들이 담겨 있어도 관련된 간명한 진리는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그 자체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규정되어 있고 1,600년간 40명 정도의 필자에 의해 쓰인 66권의 책이 하나의 책으로 묶일 정도로 조화를 이루고 있죠.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온전한 일관성이 있습니다. 수치가 중요하다고 한다면 40억 부 이상 발행된 베스트셀러이기도 하죠.
예수는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창조주의 생각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의 필서도 그러한 것이라고 하고 있죠.
인간에게 앎의 욕구와 그 기능을 부여한 분이 그것을 온전하게 충족시켜 주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만이 살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죠. 진정한 앎이 되는 것이며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도덕적인 유일한 앎은 말씀(성서)을 통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