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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by 법칙전달자

멀리서


어두침침한 가운데 멀리 있는 것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뭔가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는 정도이고 조금 밝아지면 동물 같은데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개 정도 크기의 포유류인 것 같다. 더 밝아져서 추적하여 확인하면 멧돼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인간이 뭔가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생물을 동물과 식물 두 계로 분류하였죠. 자세히 살펴보니 셋이 적합하다고 생각되었고 그 뒤로 계속 넷, 다섯 한 때는 8계로 분류하다가 최근에는 6계로 분류하고 있다고 하죠.


오성계(지성계) 즉 학문계의 지식도 모든 영역에서 그렇게 발전해 왔죠. 학문은 분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처음에는 같은 분류목록(구분지)에 속했던 것들도 자세히 연구하다 보면 새로운 차이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 또 분화하게 되죠.


이러한 점은 어떤 영적인 지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들은 전 인류기준으로 그렇게 얻어가는 것이 있으며 또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러하죠.

삶의 한 과정은 지성과 이성에 있어서 그 지식들을 쌓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자의 길은 아침의 밝은 빛과도 같으니, 한낮에 이르기까지 점점 밝아진다.(잠 4:18)


그러므로 지금 알고 있는 것이 흡족하지 않고 인류 차원에서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많은 것들에 대해 답답해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앞으로 조정되는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에 지식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과도기적 과정에 어쩔 수 없었던 것들도 있으니까요.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을 다루는 것도 그렇고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고려해야 하죠. 창조주가 고대의 이스라엘에게 제공한 지식이나 다루는 방법은 예수시대의 영적으로 계몽된 사람에게 그렇게 한 것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죠.


점진적인 인도에 따라 정확한 지식들이 시기에 맞게 밝혀질 때가 있다고 생각하고 겸허하고 순종적인 자세로 기다릴 필요가 있죠. 주제넘게 나름대로 판단하고 주장하면서 거스르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인간은 설명을 듣거나 보는 순간에 그리고 반복해서 장기간 그렇게 하는데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나중에 이해하고 나서야 그 당시에 경솔히 부정적으로 판단하거나 함부로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리석은(무분별한) 자는 마음속으로 “여호와는 없다” 하고 말한다. 그들은 타락한 행동을 하고 가증한 행위를 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시 14:1)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신이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장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실제 생활은 무신적, 세속적이죠.


악한 자의 길은 어둠과도 같으니,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모른다.(잠 4:19)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쓰러져 있는 시체와도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력이 없어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알지 못하죠.


인간은 전적으로 피조물입니다. 창조주의 인도에 따라 점점 밝아지는 광명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죠. 창조주나 그런 인도가 없다고 단정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 가는 길은 전혀 예외 없이 멸망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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