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인가보다
하라는 운동하고 먹으라는 음식 먹고 체중관리도 잘 하고 담배도 안피우고 과음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최상으로 건강관리를 잘 해왔는데 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암선고를 받고 요양병원에서 오늘 내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도덕적으로도 흠잡을 때 없이 살았고 선행도 많이 했고 유명작가로서 존경고 받고 자식도 잘 키워 보란듯이 일류대학에 보냈고 종교생활도 잘 했는데 왜 외아들의 교통사고로 참척의 변을 당하는 것입니까?
운명인가보다 하고 체념해야합니까?
80대의 한 노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내 인생은 거의 끝나가는군. 너무 빨리 가버렸어. 남은 인생이란 거의 없군. 인생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남은 것이란 오직 무덤뿐이지. 그리고 망각이 있지. 그건 모두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었던가! 냉소자들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말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군.’
오래 전에 이유를 모르면서 고통스런 시련을 겪고 있던 한 사람은 절망 가운데 인간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구나. 그는 한 송이 꽃처럼 왔다가 시드는구나. 그는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계속되지 않는구나.”—욥 14:1, 2, 개역 표준역.
이것이 인생의 전부입니까? 인생에는 과연 의의가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지금 오랜 세월동안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제기해 온 질문입니다. 특히 그들이 늙어감에 따라 그러합니다. 그들은 인생을 회상해 보고 인생에는 어떠한 의의가 있는가 궁금하게 여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 많아 사망한 노인의 장례식에서 ‘응, 그는 충분히 살았어.’ 하고 말할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죽음은 이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할 것압나다. 그러나 지나간 충분한 인생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더 쉽게 해 줍니까? 아니면 그것을 더 어렵게 만듭니까? 충분한 인생보다는 공허한 인생을 버리는 것이 더 쉽지 않겠습니까? “나는 너무 행복해, 그래서 자살할 거야!” 하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살에 의존하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어제의 충분한 위(胃)는 오늘의 텅빈 위를 위안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애 중 의미심장한 것으로 보이던 것은 종종 죽음이 가까와 옴에 따라 그만큼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생은 그 의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쓸쓸해지고, 인생은 값싼 것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좌절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소홀히 여겨지고, 노인들은 쓸쓸한 요양소로 보내집니다. ‘스트레스’는 심장이 마비되거나 폭발할 때까지 고조됩니다. 정치적인 부패는 만연되고 신뢰성에 간 금은 넓어집니다. 상태를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는 염려하는 개인들의 영향은 벼룩이 코끼리에게 가하는 충격에 지나지 않습니다. 환멸이 생기고 사람들은 무의미한 일에 몰두합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미국의 ‘베스트 셀러’ 중 하나인 「자기 도취주의 문화」는 다음과 같이 말합나다. “중요시할 만큼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인생을 개선할 희망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중요한 것은 심적인 자기 개선 즉 자기들의 느낌들과 접하고, 건강 음식을 먹고, ‘발레’나 허리 춤 강습을 받고, 동양의 지혜를 구하는 데 몰두하고, ‘조깅’을 하고,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임을 스스로 확신하게 되었다. ··· 그들은 보다 생생한 경험들을 배양하고, 나태한 육체를 쳐서 생기가 나게 하려고 애쓰고, 줄어든 식욕을 다시 일으키고자 시도한다. ··· 정신 건강은 억제를 무너뜨리고 모든 충동에 대해 즉각적 만족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29, 39, 40, 43면.
사람들이 이러한 행로를 추구할 때 그들의 무의미한 인생은 더욱 더 무의미해지고, 또 도피하려고 더욱 필사적으로 노력하므로 성적 방탕과 도착에 뛰어들고, 만행과 무분별한 폭력를 자행하고, 마약을 사용하고 심지어 최후의 도피를 위한 선택 즉 자살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인생에는 아무런 의의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간 몇년을 보내고, 그 다음에는 무덤과 망각으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에 어떻게 의의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인간을 개미나 메뚜기보다 더 중요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광대한 우주 공간에서 인간은 여기 잠간 있다가 영원히 사라지는 무관하고 결과없는 허무한 것처럼 느낍니다. 인생은 쓸모없는 하나의 동작처럼 보입니다.
“내 인생이 어떻게 의의있는 것이 될 수 있는가?” 하고 어떤 사람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가버리면 누가 나를 그리워하며, 또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할 것입니까? 그리고 만약 어떤 누가 그렇게 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것입니까? 나는 수십억 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 누가 나를 알아 주고, 누가 나를 염려해 주고, 누가 나를 기억해 줄 것인가?’
인생이 그렇게 덧없이 지나가고 망각의 장래가 뒤따른다면 그것이 어떻게 의의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의의와 영원성의 필요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영혼불멸과 영혼 환생의 교리가 인간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어떤 것—저서, 그림, 작곡, 기증, 창립 및 그들이 여기서 살았었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될 만한 어떤 것을 뒤에 남기고 감으로써 현재의 이 인생을 기억할 만한 것으로 만들 필요를 느낍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느끼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까지도 현재 살고 있는 뛰어난 사람들에 의해 명성이 가리워지게 되어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이러한 인생의 사실을 변경시키고자 하는 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전도 1:14, 공동번역.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들의 인생을 의의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목표를 향해 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들에는 지속적인 특징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의의는 시간과 우주 공간에 계속 존속할 것입니까?
궁극적 의의의 근원은 창조주께서 인류를 위해 정해 놓으신 그 일을 기꺼이 행하는 것입니다. 즉 땅을 돌보고, 미화하고, 동물을 사랑스럽게 감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아래서 생명을 즐기면서 창조주를 찬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들은 더는 공간에 의해 미소해 지거나 시간에 의해 끝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 때 각자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조화하고 그 목적을 성취시켜 나갈 것입니다. 그 때 각자의 인생은 의의 즉 사람과 하느님에게 의미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의 궁극적 의의가 시간 가운데 끝나는 것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왕국 아래 이루어질 낙원의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