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주의자는 없다
법칙이란 예외 없이 철저하고 엄격하게 적용되며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몰랐다는 번명도 전혀 통하지 않죠. 인류는 법칙에 대한 지독한 무지로 고난을 겪고 죽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무엇보다 절대적입니다. 법칙들의 적용여부도 선택할 수 있죠. 멸망이나 공의의 법칙도 그러합니다. 법칙을 이용하여 낭떠러지로 뛰어내려 자살을 선택할 수 있고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 평생 그런 죽음은 겪지 않을 선택을 온전히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자연은, 우주는, 창조주는 그것을 제지하지 않습니다. 만물의 기본법칙이고 인간중심원리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끔찍한 비극을 당해도 그 법칙에 책임을 돌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겪는 모든 불상사가 조금도 창조주에게 그 책임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로 멸망될 것이라는 소식을 약 60년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직계가족을 제외하곤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기회주의적인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이 추리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요.
"혹시나 노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죽게 되겠지. 그리고 그럴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니겠어? 일단 방주에 탔다가 실제로 홍수가 일어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지. 일어나지 않으면 방주에서 나오면 되니 그렇게 손해 볼 일은 없잖아. 사람들에게 약간의 조롱은 당할 수 있겠지만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방주에 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었겠는데 그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기회주의자가 시험해불 수 있는 경우는 없었죠.
마테 11장 25절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 이러한 것들을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알려 주셨으니, 제가 아버지를 공개적으로 찬양합니다.
아무리 지능이 높아도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원리에 대해 예수께서 찬양한 것이죠.
하느님의 공의는 피조물들이 납득할 수 있게 집행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겉으로만 순종하는 척하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은 구분하지 못할 수 있죠. 양무리 속에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있을 수 있죠.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악귀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회주의적인 생각으로 양인 것처럼 행사한 사람에게 형벌을 내린다면 주변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워할 수 있으며 불필요하게 창조주의 공의에 대해 부정적인 의식을 갖게 될 수 있죠.
그러나 그런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런 일도 생기지 않는 것이죠.
창조법칙의 정의는 "의식 있는 존재의 행동의 결과를 관장하는 영적 우주적 법칙"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행동의 원리, 원동력이 바로 믿음이죠. 믿음법칙에 따라 사람들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며 믿지 않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죠.
방주에 타지 않으면 노아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죠.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 말씀의 가치를 믿지 않는 것이죠. 믿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에 대한 이해는 지능에 있지 않고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겸손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게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믿죠. 그러므로 말씀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법칙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죠.
증거가 아무리 많아도 이를 고의로 부인하죠. 그 기적적인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고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행해 일단 나왔습니다. 그리고 홍해바다가 갈라져서 이집트의 군대로부터의 구출도 체험하였죠.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매일 먹으며 살면서도 창조주의 법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오즉했으면 하느님이 모세에게 그들을 다 멸망시키겠다고 하였겠습니까?. 결국 그들 대부분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죠.
오늘날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여 창조의 법에 순응하여 살지 않는 사람들은 증거가 없어서 그러한 것도 아니고 지능이 낮아 그러한 것도 아닙니다. 교만이나 고집이 그 원인이죠. 세상에서 베우고 틀 잡힌 자신의 가치관이 더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반증들은 고의적으로 외면하죠.
그리하여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데후 3:3)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누가 18:8) 그러나 압도적인 무신론적 경향하의 현 세상에서도 그러한 믿음을 갖고 창조의 법에 순응하는 사람은 천만 정도 되죠.
일세기 당시에는 많아야 10만 정도였고 그 뒤로는 영적 암흑시대여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었죠. 그리고 말세인 오늘날에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한 무리를 형성하게 되죠.
자유의 법칙이 지배하는 영역에는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미래의 진실은 없는 것이죠. 그러나 무생물적인 조건이나 마련은 그 반대입니다. 미래가 미리 있는 것이죠.
예를 들면 신대륙은 그것이 유럽사람들에게 발견된 15세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10세기의 유럽인들에게도 신대륙은 이미 있었죠. 지금은 신대륙에서 유럽인들이 많이 이주해 와 살고 있죠. 10세기를 기준으로 하면 그들에게는 미래인 신대륙이 이미 있었던 것이죠.
마찬가지로 낙원이 된 지구는 미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보이죠. 아브라함도 미래의 도시를 그때 있는 것처럼 바라보며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냐 하는 것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개인이 정하는 것이죠. 미래의 생사여부는 지금 개개인들이 정하는 바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면에 있어서 기회주의자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믿지 않으면서 방주에 타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원리에 대해 예수께서 미리 찬양한 바와 같죠.
멸망되어 미래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