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에 봉착할 때

by 법칙전달자

한계에 봉착할 때


취미로서 바둑을 둔다고 해도 실력 향상을 구체적으로 목표하고 노력을 기울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 그렇게 해도 5급 , 3급 정도에서 그 이상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로기사가 되기를 원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이 일부는 실제로 그렇게 되지만 프로가 된다는 것 자체가 최종목표는 아니기에 더 높은 단계를 향하여 계속 노력합니다. 인간의 어떤 분야에서의 목표는 절대적인 것이 있고 상대적인 것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인 것이고 최정상에 오르는 것, 최고가 되는 것이 목표이죠. 일인자가 되는 것인데 그 일인을 빼놓고는 모두 실패하는 것이며 그 일인도 일시적인 경우가 많죠.


구체적으로 누구 정도가 되면 된다는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가수나 작곡가가 되는 경우도 그러하죠.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탑가수들이 있었죠. 그들은 많은 부와 명예를 얻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인 경우 작곡가로서 길이 남는 업적을 남겼죠.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은 과학계에서요.

사상적 논문을 쓰는 사람이라면 칸트의 저서의 특징인 논리적 정교성을 본받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기존 명사들의 혀를 내두를 정도의 탄복할 만한 표현 기법에서 영감을 얻으려 할 수 있습니다.


성군이라 평가받는 역사상으로 유명한 몇몇 통치자들도 있죠. 기록적인 금메달수를 가진 스포츠인들도 있죠. 상대적으로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을 가진 국민배우로 일컬어지는 사람들도 있죠.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다가 하다가 안되어 체념하고 그러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하면서 그러한 사람들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다면 그런 사람들은 경쟁과 시기의 대상이 될 수 있죠. 저 사람만 없었으면 내가 우승을 하여 명예와 돈을 독차지할 텐데 하고요. 특히 2등은 더 그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때 추구했지만 지금은 포기한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들을 선망의 눈초리로 볼 수 있지만 이는 상대적이죠. 그런 경지라고 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 사람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높은 경지에 대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바둑이 1급인 사람들은 자신이 서너 점 놓고 두어도 이기기 힘든 프로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하겠지만 5급 이상으로 실력이 올라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찬가지로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막상 프로들이라 할지라도 목표도달에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좌절하여 체념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지배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은메달을 받고서도 그렇게 통곡을 하면서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겸손과 겸허는 부득이하여 마지못해 혹은 억지로 지니게 되는 경우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겸허나 겸손은 아닐 수 있습니다.


뭔가 그렇게 되고 싶지만 인간은 누구나 한계에 봉착하죠. 신체적인 면으로 건강하고 젊어지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죠.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싶어 소위 국민배우 아무게처럼 되게 해 달라며 성형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육상 선수가 아무리 노력해도 기록 단축에 한계가 있죠.


그리고 바둑에 있어서 최정상의 기사라 할지라도 인공지능과 바둑을 두면 두세 점 깔아도 안 되는 것입니다. 바둑인 경우 발전의 정점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퍼즐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최선의 수라는 것이 있는 것이죠. 그것이 100이라는 경지라면 인공지능의 경우 90 이상에는 도달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상급 기사들은 60이나 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모든 면에서 잘하고 싶어합니다. 가능하면 절대의 경지에 이르고 싶어하죠. 상대적으로도 최상위 그룸에 속하고 싶어하죠. 그러면 돈과 명예도 따라올 수 있고 그런 식으로 출세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원래의 인생의 직접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그러면 원래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고 자신의 추구에 있어 어떤 한계에 봉착할 때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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