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눈과 영안
'see'는 '이해하다, 깨닫다'의 의미로도 사용되죠. 이해의 본질적 의미는 "요소들의 관계를 보다"라고 합니다. '통찰'이나 '직관'에도 '보다'는 의미가 들어 있죠.
뉴톤은 중력을, 아인슈타인은 공간의 휘어짐을 통찰한 것 즉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둑의 수를 더 잘 보이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죠.
모양이나 색, 크기 같은 외형적인 것을 보는 것도 눈으로 보는 것과 뇌로 보는 것 두 가지가 있죠. 꿈만 뇌로 보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도 뇌에 영상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죠. 자신만 볼 수 있는 영상이죠.
성서에는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한다. 사탄이 세상사람들의 정신을 눈멀게 했다와 같은 표현들이 있죠.
제3의 눈, 마음이 눈, 천리안, 혜안, 안목 등등 눈과 관련된 다양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귀신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건 모르겠습니다. 성서에 창조주가 꿈으로 메시지를 전하거나 영적 세계를 환상으로 보여주었다는 시사는 여러 군데 있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속사람을 보는 눈입니다. 남과 자신의 내면을 간파하는 눈이죠. 보통 상당수의 정치인들을 얼굴을 보면 그 탐욕스러운 기운이 줄줄 흘러넘치죠.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정치에 대한 관심이나 특정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까? 뭔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죠. 어떤 사건에 대한 관련된 내막 전체가 훤히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을 단서로 그 이면이나 그 전체, 그 과거나 미래까지도 볼 수 있습니까? 현상을 보고 그 본질을 간파할 수 있습니까? 그 성질이나 관계가 보입니까?
인간의 육안의 시력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영적 성장 즉 각종 영적 기관들을 발전시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영안이라는 것이 있죠.
영적으로 정확히 볼 줄 알아야 올바로 시정하고 개선할 수 있으며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어떻게 무지한지 볼 수 있어야 참 지식을 쌓아갈 수 있죠.
그러나 그러한 눈을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이사야 32:3에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습니다.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 [라.]” 인간의 진리와 의에 대한 간절한 열망은 창조주가 보실 수 있고 그에 대한 외침은 들을 수 있죠.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 그들의 이해의 귀가 트이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사물들을 볼 수 있게 되죠. 각 사람의 사랑의 크기나 형태를 볼 수 있죠. 영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도요. 하늘 정부도 볼 수 있습니다.